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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시수리시설로수몰된마을이야기
머갱이, 구르게골이 자신이 사는 마을이라고 불러 이러한 지명에 더 친근감이 갔다. 하지만
지금은이를기억하는주민이거의없다.
신창리에는 상장례 의식과 관계된 것으로 ‘연반’이 있다. 사람이 죽어 부고를 보내는 것
을연반이라고한다.저수지아래마을을윗말아랫말로나누어부르기도하는데각각연반
이 달랐다. 그래서 상여집이 따로 있어 별도로 운영을 했다. 초상이 나면 연반을 하고 상여
를모셔산으로가서무덤을조성했다.이러한전통은지금도남아있어마을에초상이나면
상여를 반드시 모신다. 하지만 상여집은 지금 사라졌고 외부에서 간이 상여를 사서 사용하
고장례를마친후불태운다.동네가운데있던상여집을마을외곽에컨테이너로조성하여
옮겼다가종내없앤것이다.
신창리의 가장 큰 모임은 대동회이다. 매년 연말에 이장이 1년 동안의 마을 살림을 보고
하는 모임이다. 1년간의 수입 지출 내역을 정리하고 감사를 받은 후 내용을 정리한 것을 마
을 주민에게 돌려 추인을 받는다. 마을 주민 대부분이 운산농협조합 조합원이어서 그쪽 운
영 공개회의에도 참여한다. 저수지가 건설되면서 살림도 나아지고 해서 지금은 마을의 분
위기가좋은편이다.
특이하게신창리에서는가설무대를만들어연극을공연하기도했다.마을청년중심으로
배역을 맡았고 연극과 노래를 공연하였다. 일본을 상대하던 ‘태양은 녹지 않는다’라는 연
극은 지금도 기억을 한다. 한 달 이상 마당에 모여 모깃불을 피워놓고 연습을 했다. 명절이
되면 마을 주민들 앞에서 공연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것은 신창리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
었다. 다른 마을에서도 이러한 공연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노래자랑을 하는 마을도 있어
상품으로삽,쇠스랑을주기도했다.
신창리 하면 떠오른 것이 삼화목장이다. 1968년 김종필 씨가 조성한 목장으로 마을 주민
상당수가 이 목장에서 일을 했다. 목장 사무 보는 이들은 대학 나온 외부사람들이 했지만,
목장 관리의 노동은 주로 마을 주민이 담당했다. 용현리와 신창리 주민들이 삼화목장에서
가장많이일을했다.신창리주민들은삼화목장에서고정적으로주는월급을쓰지않고모
아 살림 밑천을 마련한 이들이 여럿이다. 이들은 집을 짓거나 자녀교육에 상당한 도움이 되
었다고한다.주로1년간소를목장의사방으로몰고다니면서풀을뜯게하는일이었다.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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