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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잊혀진시간을말하다3
한마지기당벼한가마니를수세로걷어갔다.
신창리는 저수지 조성 당시 125호에 이를 정도로 큰 마을이었다. 저수지가 있는 산쪽으
로부터 1반이었고 모두 5개 반이 있었다. 이중 1반은 25가구 정도로 이중 13가구가 수몰되
었다. 7가구는 신창리 다른 반으로 이주하고 나머지는 다른 마을로 이주하였다. 저수지가
건설된 서산의 다른 마을과 달리 신창리는 수몰된 마을의 규모가 작아 마을 자체에 큰 변
화가있는곳은아니다.저수지건설로농업이활력을띠면서발달한마을인셈이다.
신창리는 전국적으로 이름난 사찰 개심사가 있는 마을이다. 개심사는 신창리 1번지로 마
을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신창리 땅 중에도 개심사의 절 땅이 분명 있었지만 지금은
소유권이 어떻게 변동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전국의 관광객이 많이 찾는 절이 되어 지금 신
창리 1반은 개심사 아래 관광마을이 되었다. 많은 주민이 식당이나 기념품 판매점을 내어
생계를 유지한다. 개심사 가는 길에 있는 신창저수지에도 산책로를 만들고 데크를 깔아 관
광객의접근이용이한편이다.
신창리는 농악을 잘 쳤다. 꽹과리 둘, 북 둘, 장구, 징, 새납으로 구성된 풍물패가 있어 용
대기를 앞장세우고 농악을 쳤다. 평상시 모여 연습을 하지 않아도 잘 맞을 정도로 기량이
있었다. 정월 초부터 정월 대보름까지 마을의 안녕을 빌면서 마을을 돌았다. 어려서 보았던
농악패 중 남자가 여장을 하고 꼽추 흉내를 내면서 춤을 추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마을
에는두레패가있어논에서일하다가두레싸움도하고용대기놀이싸움도했다고하지만
박영진씨는이를직접보지는못했다.동네집집마다농악을치면서3일정도돌았다.추석
때도마을회관에모여농악을치며놀았는데이를풍장이라고도불렀다.
신창리는 다양한 세시풍속이 있었다. 2월 초하루 머슴날, 사월 초파일, 추석, 동지는 기억
에 남아있다. 동짓날에 개심사에서 팥죽을 쑤어 마을주민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으니 개심
사와마을은매우가까운관계였음이분명하다.
신창리를 고창골이라고도 불렀다. 각 반마다 부르는 이름이 있어 양지마을, 새터 등으로
불렀다. 개심사가 있는 산은 가야산 줄기로 생전골을 지나야 갈 수 있었다. 개심사가 있는
곳을 절산, 승당뒷골이라고도 불렀다. 동구마루를 물방아골이라 불렀고, 1반 아래는 머갱
이, 2반과 3반의 경계는 구루게골이라 불렀다. 신창리라는 마을 이름이 있었지만 주민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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