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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서산천수만의옛모습
안면도에 있었는데, 그 집 역시 기와집으로 최고의 건물이었다고 한다. 당시 간
척을 많이 해서 농지를 많이 소유했으나 토지개혁 당시에 소작농들에게 불하했
다고한다.
중선 제작은 1960년대 초반에는 창리에서 직접 목수를 데려다가 제작했다.
집 앞에서 목수들이 20톤짜리 배를 짓는 것을 보았다. 배 밑에 둥글목을 놓고 1
년여 동안 배를 지었다. 배가 완성된 후에는 볏짚으로 꼰 동아줄을 배에 매고는
그 줄을 동네 최고 어른 중 목청 좋은 분이“으야! 으야!”라고 하면 동네사람들
이 끌고,“쉬어라!”라고 하면 쉬고, 다시 끌라고 하면 끌어서 바다로 끌어냈다.
가장 물이 많이 들어왔을 때를 정해 배를 진수했다. 이 배는 노를 저어 움직이
는 풍선이었다. 그 후 1961년에 투사이클이라는 화약 넣고 시동하는 엔진을 단
배를 장항의 흥국조선소에서 지었다. 디젤 기관차가 처음 들어오던 시기로 얌
마 45마력의 엔진을 놓았다. 20톤의 큰 배를 45마력의 엔진으로 끌고 다녔는데,
이는 풍선을 움직이던 기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배로는 흑
산도, 가거도, 연평도 등지를 다니며 고기를 잡았으며, 동지나해로는 나가지는
못했다. 그 후 1968년에 흥국 조선소에서 3번째 배를 건조했는데, 이 배는 다른
사람이 운영하던 것을 중고로 구입했다. 3척의 배를 소유했기에 목포와 연평도
를 다니며 조기와 갈치, 새우젓 등을 잡았다. 선장을 비롯해 선원 8~9명이 함께
승선해 조업을 했다. 연평도에서 잡은 조기는 지금과 달리 길이가 30㎝로 컸다.
조기는 조기를 잡은 인근의 장에서 판매했는데, 주로 동인천과 인천, 군산, 대
천, 장항 등지에서 판매했다. 새우젓은 주로 목포에 팔았다. 새우젓 잡이가 신
안앞바다에서 이루어지므로 목포에 큰 장이 섰기 때문이다. 어물은 어판장에
위탁해 판매했다. 간혹 어물을 판매하지 않고 가지고 돌아오기도 하는데, 어물
의 가격을 제대로 받을 수 없을 때에는 조기는 염장해서 가지고 오고, 새우는
김장철에는생새우로가져왔다.
조기는 음력 4월에 염장해서 집 앞에 콘크리트로 지은 두 채의 창고에 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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