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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적극부인했다.그럼에도불구하
고,한현의밀서와초사에‘호남을오
가며서로약조했다’거나,다른연루
자들의 공초에도 지적된 것이 20여
명이 된다는 이유로 사형에 처해졌
다.이러한조치는민심의동요를우
려한판단때문이었다.사형에처해
진김덕령은송유진의난당시동참
했던 의병장 이산겸을 휘하에 두었
다.송유진의난을진압하면서선조
는의병장에대한감정이상당히적
대적으로 바뀌었는데, 이러한 정황
이 김덕령에게 적용된 것으로 추정
된다.
김덕령의신원과복관은현종대
이루어졌다. 신원과 복권 당시 “강
임득의영정(충청남도유형문화재제203호,
개지사(慷慨之士)로서 절개가 컸으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소장)
며용력이빼어났다.임진왜란때에
의병을일으켜가는곳마다격파하였으므로왜구가감히접근하지못하
고피하였다.선조가이를가상하게여겨곧장공조좌랑에임명하고익
호장군(翼虎將軍)이라는호를하사하니,이때부터이름이크게진동하
였다.그런데시기하는자가이몽학의패거리라고그를지목하면서유언
비어를날조하여위에보고한뒤공동으로모함한결과,마침내하옥된
뒤장사(杖死)되었으므로,이를원통하게생각하지않는호남사람이없
었다.이때에이르러한재때문에도신(道臣)에게명하여아직원한을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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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당시이몽학의난과청난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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