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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려 1년에 논 3~4마지기를 살 정도였다. 잡은 고기는 고북에 있는 분조합에 매각하였
고, 잠은 갯고랑에 배를 대고 잤다. 무동력선이라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현지에서
잠 자가면서 고기를 잡았다. 당시 빙도에는 0.5톤 정도 되는 뗀마가 많았고, 대하를 잡
으러 가는 배들은 대략 2톤 정도 되는 무동력선이었다. 닻 2개, 노 2개를 달아 움직였고
서산AB지구까지가는데4~5시간걸렸다.밀물썰물을이용하여다녔다.
빙도 어린이들이 학교 다니기 불편하여, 오천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을 찾아가고, 보령
교육청을 찾아가 사정을 이야기하여 학교를 지었다. 당시 학교를 지은 땅도 마을에서 희
사를 했고, 학교 짓는 터도 주민들이 닦았다. 장비가 없어 주민들이 괭이로 파고, 가래
질해서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입학한 사람들이 현재 51세이다. 그러니까 1970년대 중
반쯤에학교가만들어졌다.
그는 26세에 결혼했는데 친구들보다 늦었다. 결혼 후에는 형 집에서 형과 함께 살았
다. 형이 동생들 결혼시키기 힘들다고 분가를 시켜주지 않았다. 이후 그는 동생들을 모
두 결혼시키고 31세에 분가하였다. 자녀는 2남 1녀를 낳아 모두 대학교육까지 시켰고,
현재모두도시에거주하고있다.
빙도에는 여러 차례 간척이 이루어졌다. 당시 장비가 없어 돌은 사람들이 목도를 해서
나르고, 흙은 구루마를 놓고 밀고 다녀 둑을 쌓았다. 제방의 양쪽에 있는 산을 무녀(허
물어) 제방을 쌓았다. 빙도마을 북쪽, 언덕 너머에 간척지를 만드는 것을 어렸을 때 보았
는데, 아버지 형제들, 사촌형들이 지게로 흙을 져다가 붓고, 배로 돌을 실어다가 흙이 떠
나가지 않도록 부었다. 돌은 빙도 북쪽에 딸린 섬인 딴섬에서 가져왔는데, 금광을 하느
라고 파낸 돌이었다. 배에 멍석 같은 것을 깔고 돌을 실어다가 물이 들어왔을 때 넣었다.
마을의 오래된 간척지는 언제 누가 막았는지는 모르지만, 나주김씨네가 많이 소유하였
었다.
간척지의수문은물을빼내기도하고,바닷물을막기도하는장치이다.빙도의간척지
에는 큰 통나무를 반으로 쪼개고, 그 가운데를 파내어, 서로 맞붙여 둑에 묻어 만들었
다. 바닷물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바다 쪽에 부드러운 짚 검불(벼의 밑에 있는
198 보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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