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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북면이곡리간척지(?태안문화원)
일제강점기이후외부자본에의한대규모간척사업이이
다. 1960년대 초반 충남 예산군의 부호가 미국인 기술자
루어진 경우도 많았다. 울산 출신의 송태관은 태안읍과
를고용하고,속칭‘아구리선’에장비를싣고와서소원면
근흥면사이의만(灣)을막아서약100만평규모를간척했
의항리에서 간척을 했던 사례도 있었다. 한국전쟁 당시
다.주민들이‘서풍농장’이라부르는곳이다.이번조사에
정부에서피난민을정착시키려고간척사업을추진하다가
서는서울에거주했던이병수가1939년근흥면도황리와
제방이 여러 차례 유실되면서 실패한 사례가 있었다. 근
정죽리 사이를 막아서 간척했던 약 28만평 규모의 ‘안흥
흥면 도황리와 마금리를 잇는 공사였는데, 제방 중에 유
농장’에대한이야기를들을수있었다.당시원뚝을막을
실된곳은지금도‘터진목’이라고부른다.
토사와 바위를 채취하는 방법에 대한 진술도 있었다. 인
우리나라간척사의한획을긋는천수만간척공사를보았
부들이 곡괭이로 산에서 토사를 채취할 때, 아래를 파 들
던 사람들과의 면접조사도 이루어졌다. 당암리에서는 간
어가면 윗부분은 지붕처럼 남게 되고, 마침내 무게를 못
척사업에 대해서 지역 주민들 사이에 찬반이 엇갈렸다는
이겨서무너지게된다.곡괭이질을조금이라도덜하려는
사실과 그 이유에 대한 증언도 청취하였다. 간척사업 진
궁여지책인 것이다. 이러한 작업과정을 ‘어장넘긴다’고
행과정과 그 이후의 변화상에 대한 증언도 나왔다. 급류
한다. 본래 “금광에서 밑부분을 파낸 장벽을 위에서 충격
에제방40m가유실되었던사건,간척사업준공후주민
을주어넘어가게하다.”는뜻으로쓰였던용어였는데,간
들이 가두리 양식장을 운영하게 된 계기와 그 이후의 변
척공사 인부들도 이러한 표현을 쓴 것이다. 어장넘길 때
화과정에대해이야기도들을수있었다.
위의토사가무너지기전흙이부슬부슬흘러내리는데이
를‘이슬내린다’고했다.이슬이내리기전에작업하는인
간척공사에서 트럭과 선박으로 토사를 운반했던 주민도
부는 피해야 한다. 이 또한 광산에서 쓰던 표현으로 보이
있었다. 장산리가 고향인 고윤현은 도내리 등 태안군의
는데,그용례는확인하지못했다.
여러간척공사현장에서덤프트럭을운영했다.도내리의
해방후에도외지인이투자목적으로이러한규모의간척
손종석은 가로림만의 구도항과 인천 사이를 왕래하는 여
을하는경우가있었다.경기도평택지역의어촌계장들은
객선까지 주민들을 실어나르는 도선(渡船)을 운영했는데,
자본금을 모아서 태안읍 도내리와 어은리에서 간척사업
도내리에서 간척공사가 진행될 때는 도선으로 잡석을 운
을 벌여서 성공했고, 경기도 연천군 전곡 출신의 투자자
반했던 경험이 있다. 간척사업 인부를 대상으로 속칭 ‘함
들은원북면청산리와태안읍삭선리사이에원뚝을막았
바집’을운영했던사례도확인할수있었다.
18 ChungnamCulturalMagazine! 2022! No.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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