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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의 서원 역사와 서원 복원의 필요성
지가경상도남해(南海)로바뀌었다. 외딴섬에서13년간고독, 풍토병
과싸우며귀양살이를하였다. 남해에있을때부인이배소까지찾아
왔다는 일화는 널리 알려져 있다.
경진년(1520) 봄에 부인 김해김씨가 한 필의 말로 짐 한 바리와 종
5∼6명을 거느리고자암의 배소(配所)에뒤따라갔다. 이때는김대성(金大
成: 金湜)이산속으로도망했던터라탐색이엄중하였다. 갈림길을지키는
군졸이 서로 바라보면서 수직(守直)할 정도였다. 무릇 나그네가 있으면
모두 수검(搜檢)한 뒤에 통과시켰다. 경상감사 반석평(潘碩枰)이 길에서
여행하는 어떤 부인이 가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길가에 멈추어
사정을물어본다음, 민망하고측은하게여겨서양식과물품을찾아주고,
또 하도(下道)로 가는 영리(營吏)를 시켜 배행(陪行)하게 하였다.
22)
김구는이어1531년전라로임피(臨陂)로옮겨갔다. 옛말로는‘양이
(量移)’라는 것이었다. 귀양 간 사람의 정상을 참작하여 여건이 조금
나은 지방으로 옮겨 주는 것이다. 임피에서 1년 반 가량 더 있다가
1533년4월마침내석방되었다. 이때까지살아남은기묘명현은김구
와 박훈(朴薰) 뿐이었다. 14년이라는 실로 긴 귀양살이였다.
석방된 뒤 그는 곧장 고향 예산에 돌아왔다. 평소 지극한 효자로
알려졌던 그는 자신이 유배살이를 할 때 세상을 떠난 부모를 위해
뒤미쳐 시묘살이를하다가 병을 얻어 이듬해 11월에 세상을 떠났다.
이때 나이가 47세였다.
김구는서예에일가를이루었다. 조선전기사대가(四大家)의한사
람으로꼽힌다.
후학들은그가쓴글씨한점이라도갖기를소원하
23)
였으며, 과거시험답안지글씨마저보배로받들정도였다고한다.
24)
22) ?己卯錄補遺? 上, ?金絿傳? 참조.
23) 사대가는 安平大君?金絿?楊士彦?韓濩를가리킨다. 李肯翊, ?燃藜室記述?
권18, 宣祖朝故事本末,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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