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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워진 가을에 서리를 맞으면서 홀로 피는
국화의 모습에서 우리의 선인들은 고고한 기품
과 절개를 지키는 군자의 모습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국화를 일컬어 오상고절(
孤 )이
라고 한다. 중국에서는 도연명(
)이 국화
를 가장 사랑하였다고 알려져 있으며, 주무숙
)은 <애련설
>에서“국화지은
일자야(菊
라고 하였다.
국화는 군자 가운데서도‘은둔하는 선비’
이미지에 잘 부합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국화
가 언제 우리 나라에 전래되었는지 정확히는
정도대왕 필 국화도(보물 제744호)
알 수 없으나 조선 세종 때 강희안(姜
)이 지은 ?양화소록
?에는 고려
충숙왕 때 중국의 천자가 보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중국에서는 음력 9월 9일, 곧 중양절에 국화주를 가지고 등고( 高)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하는데, 우리도 9월 9일에 민간에서 국화주를 담가 먹는 풍습이 있었다.
고려가요 <동동
> 9월령에“9월 9일애 아으 약이라 먹논 황화(
)고지
안해 드니 새셔가만 하얘라 아으동동다리”라고 하였으니, 중양절에 국화주를 담가
먹었고 그것을 약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고, 또한 고려시대에 이미 우리
나라에도 국화가 있었음도 알 수 있다.
청양 지방의 <각설이타령>에도“9월이라 9일날에/국화주가 좋을시고”
라는 구절이
있고, 경상북도 성주지방의 민요에도“뒷동산 쳐다보니/국화꽃이 피었고나/아금자금
꺾어내여/술을 하여 돌아보니/친구하나 썩 나서네.”
라는 구절이 있다.
국화는 한국의 고전문학, 특히 시조에서 도화(
)?매화와 함께 자주 제재로
등장하였는데, 그 중에서 송순(
)의 <자상특사황국옥당가
歌>와
이정보(
)의 작품 등이 널리 알려져 있다.
속담에는‘짚신에 국화 그리기’
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격에 맞지 않는 짓을 하거나
주가 되는 것이 천해서 화려하게 꾸미는 것이 당치 않을 때 이를 비유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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