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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새벽 일찍 삼청공원에서 가벼운 운동을 하고 돌아오시는가 하면 화초를 좋아하고 화분에
분재를 즐겨 가꾸시기도 했습니다. 원고 인세(
)라도 받는 날이면 우리들의 예쁜 원피스와 구두도
사주셨습니다. 또한, 음악과 골동품을 좋아하시어 거문고와 도자기를 사들이기도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시 <살어리>를 쓰신 후에, 어쩌다가 내가 그 시를 암송이라도 할양이면 더없이 흐뭇해
하셨습니다. 그때 우리 집은 경기중학교 아래 목욕탕 앞집으로, 당시 윤보선 대통령 댁 근처에 살았습
니다. 퇴근 후 아버지께서 귀가하실 무렵쯤에 골목길에서 이웃 친구들과 함께 놀고 있다가“아빠!”
하고 품에 안기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지금도 콧마루가 찡합니다.
원고를 쓰랴, 강의 하랴, 방송국 출연을 하랴, 바쁘신 나날을 보내실 때에 노천명(?
) 선생님,
최정희(
) 선생님, 모윤숙(
) 선생님, 그리고 중앙대 신영철 교수님께서 우리 집에 자주
찾아오셔서 말씀들을 나누다 가시던 생각도 납니다.
본디 우리 집은‘아라비안나이트’
에 나오는“열려라, 참깨!”하면 스르르 열리는 아치형 돌문같이
생긴 문 위에 나무로 조각한 큰 호랑이가 있었습니다. 돌계단을 한참 따라 올라가야 대문이 나오는
99간 전통 한옥이었습니다만 경기중학교(지금의 정독도서관) 담장 바로 옆에 도시계획으로 큰 길이
나게 되어, 그 집을 일제(
)에 헐값으로 팔 수 밖에 없었습니다.
대동아전쟁 막바지에 이르러 아버지께서는 징용을 피하기 위해 한때 당진으로 내려가 면사무소
서기를 지내시며 당진 읍내 대채골에 붉은 빛 참죽나무로 덩그런 기와집 한 채를 2년간이나 걸려 지으
시던 기억도 새롭습니다. 그때만 해도 마을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었는데 아버지께서 처음으로 전기를
끌어들이셨습니다.
해방이 되고 다시 서울로 올라오신 뒤에도 당진 집으로 내려가 유성기와 라디오를 틀어놓고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유화를 그리시던 모습 또한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할아버지께서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증조부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을 더욱 불려 어려운 이웃을
위하여 베풀기도 하시어 서산시 옥녀봉 입구 단군전 아래에 송덕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원고 말미에‘꽃동네에서’
라고 항상 밝히곤 하셨는데 화동(
)에 사시던 때문이었고,
그 육필 원고가 온데간데없이 모두 사라져버려 마냥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생전에 가장 가깝게 지내
셨던 중앙대 신영철 교수님께서 북으로 끌려가시지만 않았더라면 보다 일찍이 작품집도 빛을 보았을
테고 복사라도 해두었더라면 아버지 자료로서 더없이 좋았을 것을, 이 모두가 자식들의 무지(
)에서
비롯된 것 같아 적이 송구스럽고 가슴 또한 아픕니다.
1979년 서울특별시‘어머니 솜씨대회’
에서 내가 대상을 차지하게 된 것도 어쩌면 아버지의 손재주를
닮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음악과 그림, 화초 등을 좋아하는 성품까지 아버지를 많이 닮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글 솜씨 만큼은 아버지를 닮지 못해 두서없는 이 글을 쓰자니 어둠 속에서 그리운
얼굴이 등불을 켜,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총총 줄이며, 아버지의 자료를 모아 시비(
) 및 시선집(
)과 시론집(
)을 펴내시어
고취 및 선양해 오신 박만진 시인과 문인 여러분들, 그리고 서산시와 서산문화원 관계자 여러분들께
깊이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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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eosan.cult21.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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