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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려했다고 한다.
동암리는 토지가 비옥하고 당산의 품속에서 여름철에 불어오는 남동계절풍을 피할 수 있어서 대마
재배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수확한 대마의 껍질을 벗겨 건조하고 물에 불려 잘게 째어 단을 만들어 보관하다가 농한기가 되면
마을 큰방에 모여 삼껍질을 가늘게 째서 만들어놓은 삼올을 일일이 무릎에 비비며 손으로 연결해서
긴 올로 만드는 삼삼기를 하는데 손길이 가장 많이 들어가는 일이다. 삼삼기를 마치면 마당에 말뚝을
박고
‘베 날기’
가 시작된다.
베 날기가 끝나면 왕겻불을 은근히 피워 말리면서 둥근 솔로 고루고루 풀을 먹이는 베매기를 한다.
베매기가 끝나면 베틀을 차려 놓고 베짜기가 시작된다. 이렇게 지루하고 고된 일을 하면서 베틀가 등
노동요가 유일한 하소연이었다. 이러한 일들은 농번기를 피하여 부녀자들이 공동으로 해오던 부업이
었으며 일의 순서마다 경험이 많은 어른들의 지도가 필요하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어른들로부터 길쌈을
배우게 된다. 길쌈을 쉽게 배우는 새댁은 마을 어른들로부터 칭찬과 사랑을 받았다.
할머니와 시어머니는 젊은 새댁의 스승이 되어 항상 잘 모시며 존경하는 전통이 이어지고 시집온
새댁이 길쌈을 잘하면 며느리 잘 얻었다고 동네에 소문이 나 모두들 부러워하였다. 그래서 새댁들은
시어머니를 잘 따르며 열심히 길쌈을 배우고 어른을 모시는 예의가 자연스럽게 뿌리내려 가정과 마을이
늘 화기애애하였다.
해미읍성 삼베 짜기 시연에 이 마을의 노인들이 나와서 참여하고 있으나 이제는 삼베길쌈을 배우
려는 젊은이들이 없어서 전통 삼베마을의 명맥이 단절될 위기에 처해 면민들이 매우 아쉬워한다.
또한 동암리는 고려 때부터 국가 통신망이었던 역( )이 있었던 곳이다. 역참(
)은 병조(
에서 관리하며 역에는 역리(
), 사리(
), 일수양반(
), 관부(館 ), 급주인(急
), 마부
), 역노비( 奴 ) 군정(軍 ), 조역백성(
) 등 역에 딸린 인원이 조선중기 상등 역에는
121인, 하등 역에는 71인 말이 10필이 있었다고하니 몽웅역은 상등 역에 속했던 것 같다.
말먹이가 되었던 미나리가 1960년대까지도 많이 재배되어 식용으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동암리에
서 언제부터 길쌈이 시작되었는지 기록은 없으나 몽웅역과 맥을 같이 하였을 것이라고 한다. 역리와
역노비가 100여명에 이른 것으로 보아 이들의 의복 공급과 역참의 운영을 위해 길쌈이 시작되었을 것
으로 보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오백여년 동안 길쌈마을의 전통을 이어온 셈이다. 이러한 전통을 지켜 자라나는 세대
들에게 우리조상들의 생활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 동암리
길쌈의 전통방식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삼베길쌈을 하시는 분들이 고령인 점을 감안하여 더 늦기
전에 기능보유자를 찾고, 마을의 젊은이들에게 길쌈을 가르쳐 맥을 이어갈 수 있는 방안을 찾았으면
좋겠다고 한다. 또한 삼베마을 동암리는 해미읍성과 함께 조선시대의 중요한 시설이 있었던 곳이라는
것을 마을에 기록물을 세워 후세에 전해주는 일은 우리세대에서 꼭 해야 할 일이라 한다.
자료를 주신 분 : 오병섭(
) 전 해미면부면장, 전 동암리노인회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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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eosan.cult21.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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