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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남열
南悅
<? ~ 1464(세조 10년)>
조선 전기의 무신이며 의령(宜寧) 남(南)씨 9세(世)로 음봉 지역(동천리) 입향조이다. 조선 개국공신 영
의정 재(在)의 현손이며 병조의랑 경문(景文)의 증손이다. 직제학 간(簡)의 손자이고 의령남씨 호군공파
파조인 건(健)의 셋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경주 이씨이다. 자(字)는 효보(孝甫)이며 부사맹(副司猛-종8품)
을 지냈다. 부인은 인천 이씨이다. 의령남씨 족보와 일부 자료에 전해지는 말로는 영조가 온양의 온천행
궁에 오다가 아산을 지나면서 이귀형(李龜馨)이 재산이 풍부(豊富)하고 혼인할 만한 딸이 있음을 듣고 직
제학 간(簡)의 손자 열(悅)과 혼인하도록 명하여 호종했던 양반·관원들이 주선을 해서 바로 혼례가 이루
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영조는 18세기의 왕이므로 시기적으로 맞지 않고 역대 왕들의 온행(溫幸) 기록에
도 그런 내용은 없다. 세종 때에 있었던 일일 수 있으나 확인할 수는 없다. 아산현의 남쪽, 현재의 염치읍
방현1리 쇠일 뒷산 중턱에 그의 묘가 있다. 묘갈은 1724년(경종 4)에 그의 7세손 천익(天翼)이 묘갈명을
지어 세웠다.
<남열의 묘와 묘갈의 일부>
[23] 남오성
南五星
<1643(인조 21년) ~ 1712(숙종 38년)>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의령(宜寧)이다. 의령 남씨 온양 입향조인 발(撥)의 손자이며 증 병조참판
엽(煌)의 다섯째 아들이고 어머니는 밀양 박씨이다. 자는 취경(聚卿)이다. 1676년(숙종 2) 병진정시 무과
에 급제하였고 여러 관직을 거쳐 삼도수군통제사(統制使-종2품)에 까지 올랐다. 그의 묘는 문중 묘역인
태안 삭선리에 있었는데 지난 2002년 가을에 지역 시설 공사로 인한 이장 과정에서 시신이 원형 그대로
보존된 채 발견되어 언론에 보도되기도 하였다. 수의와 염습 용품 등의 출토품이 다량 발견되었는 바 출
토품이 모두 국립민속박물관에 기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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