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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량 중점량 하점량 창적 부거산 칠목 행촌 오산 내황동 외황동의
20
개리와 소동면의 조원
원내 가리 용곡 기곡 가야 거산 덕동 화산 궁동 신당 신성 남방 방축 신촌 화달 수여 조
내 신교 오삼 시목 정안의
22
개리와 대서면의 원내리와 소서면의 화달리와 북면의 신리 기곡리
2
2
합하여 이곳에 있는 학성산의 이름을 따서 학성면이라 하여 아산군 편입되어 가내 가덕 궁화 남
성 득산 수장 신곡 신달 보옥 오목 읍내 점량 창암 행목 황산의
15
개리로 개편 관할하였는
1917
년에 오목리가 충남선의 역으로서 급히 발전됨에 따라 면사무소를 읍내리에서 옮기는 동시
에 면 이름을 신창면으로 고치고
1986
년 온양읍이 시로 승격되면서 득산 점량 실옥리를 온양시에
넘겨주고 현재 오목 읍내 창암 황산 행목 수장 신달 남성 궁화 가덕 신곡 가내의
12
개리를
관할하며 동쪽은 온양시 남쪽은 온양시와 송악면 도고면 서쪽은 도고면과 선장면 북쪽은 인주면
과 염티읍에 닿는다 도고면의 인구는 총
11,230
명이고 세대는
3,545
세대가 산다 그리고 신창면
의 면적은
39.85
이다 신창면의 토지 지목별 현황을 보면 전
7,524,667 ,
12,733,969 ,
수원
802,179 ,
목장용지
61,657 ,
임야는
11,548,925
이다
신창면의 가축사육 가구를 보면 가축을 사육하는 가구는 총
261
가구로 한우는
133
가구 젖소
48
가구 돼지
52
가구 사슴
18
가구이다
신창면의 금융기관 현황을 통화금융기관과 비통화 금융기관으로 나뉘다 신창면의 금융기관은 총
6
개인데 이중에서 통화금융기관내에 포함되어 있는 금융기관으로 농협
2 ,
새마을금고
2 ,
2
신창면의 의료기관은
2
1
1
종사자수를 보면 사업체수의 합계는
404 ,
개 종업원수의 총계는
3,448
명이며 이중에서 농림수렵업
1 ,
12 ,
명 제조업의 사업체수는
62
개 종사자수는
2,175 ,
명 건설업의 사
업체수는
3 ,
14 ,
명 도소매 및 소비자용품 수리의 사업체수는
78 ,
개 종사자수는
180
명 숙박 및 음식점업의 사업체수는
126 ,
개 종업원수는
250 ,
명 운수창고 및 통신업 사업체수는
20
개 종사자수는
43 ,
명 금융 보험업의 사업체수는
6 ,
66 ,
명 부동산 임대 및 사업 서비스
업의 사업체수는
8 ,
11 ,
명 공공행정국방 및 사회보장 사업체수는
3 ,
38
명 교육 서비스업 기업체수는
15 ,
명 종사자수는
490 ,
명 기타 공공사회 및 개인 서비스업 사업체는
77 ,
개 종사자수는
95
명이다
신창면의 사회복지시설로는 아동복지시설
3
1
은 전무한 상태이다 신창면의 문화재 현황을 보면 문화재는 도지정 문화재로
5
문화재 자료 제
225
호로 아산군 신창면 읍내리에 소재 신창향교 문화재 자료 제
235
호 신창면 읍
내리 소재 인취사 석탑 문화재 자료 제
236
호 신창면 읍내리 소재 신창 척화비 문화재 자료 제
237
호 신창면 읍내리 소재 김육비 문화재 자료 제
244
호 신창면 읍내리 소재 신창학성이 있다
예전에 신창현에 있던 공북정은 비록 그 건물
이 없어지고 유지
나마 알 수 없게 되었으
며 오직 그 정자
의 정경
을 그려 놓은 서거정
의 형기
가 남아 있으므로 아
래에 적어 둔다.
서거정의 기문
에 무송
"
윤상국
윤자운
이 거정에게 말하기를 신창태수
조 이가 새 정자를 짓고 공북이라 편액
하고는 그 기문을 요구
해 왔으니 그
대의 말이 있기를 바란다
. "
하였다
내 추억
하건대 병자년
여름에 서원의 공성
으로부터 이른바 신창
이란 땅으
로 길을 들어 지나는데 나의 동년
同年
인 태수 김표
이 길로 나와서 나를 맞아 주었다 때는
바야흐로 혹열
이었는지라 잠깐 나무 그늘에 앉아 술잔을 나누면서 이내 그 고을의 대약
형편
을 물었더니 김이 말하기를
"
이 고을이 지역이 좁고 백성도 적으며 토질이 박
하고
이 적은데다가 아전
들은 간사
완만
하고 백성
역시
시끄럽고
또 송사
를 좋아하는데 반하여 나는 서리고 얼킨 것을 다스리어 부석 분별
할 만한
재간
이 없어 다만 요동
하지 않도록 할 따름이요 너그럽게 대할 따름이다
."
하였다 나
는 말하기를
"
옛 사람이 이르기를 작은 고을을 다스리려면 생선
을 삶을 때와 같이 하라 하
."
였으니 군의 고을 다스리는 방법
이 거의 그 대체
를 얻은 것이다 군의 뒤을 이어 오는
자로 하여금 군의 마을을 마음으로 하고 군의 정사
를 그대로 실행
한다면 어찌 다스려지
지 않을 이치
가 있겠는가
."
하고 나의 노정
이 급박
으로 말미암아 드디어 거기서
고별
하고 가버렸던 것이다 그 후 몇해 만에 호남지방으로 가는데 또 이 길로 지났더니 태수
윤호공
이 길에 나와서 나를 맞아주고 술잔을 들었는데 내가 그 고을 다스리는 법을
물었더니 그이 대답
對答
이 나의 동년 김표
와 같았다 또 나의 갈길이 바쁘고 역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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