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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큰 절개를 마음속으로 숭상해온 터에 어찌 이런 것들을 핑계 삼아 거절할 수 있
겠는가. 또한 애초부터 공의 이야기를 한번 글로 써보고 싶었던 바를 그만둘 수 있
을까 보냐. 이에 감히 사양하지 않고 적어 본다.
공(公)은 덕수(德水) 이씨(李氏)요 이름은 순신(舜臣)이며 자(字)는 여해(汝該)이다.
세종조(世宗朝)때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정정공(貞靖公) 변(邊)의 5대손이다. 인종
(仁宗) 원년(元年) 을사(乙巳)에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이미 보통 아이들보다 특출
했다. 여러 아이들과 함께 놀 때에도 진을 치는 흉내를 내며 대장으로 대접을 받았
으므로 어른들이 기특하게 생각하였다. 성장하면서는 활을 쏘는 재주가 남보다 뛰
어났다.
병자년(1576년)에는 무과(武科)에 급제하였다. 병법에 관한 책인 무경(武經)에 나
오는 황석공(黃石公)의 글에 대하여 시험관이 시험할 때에는 검시관이,
「장량(張良)이 적송자(赤松子)를 따라가 놀았다 했으니 과연 죽지 않았겠느냐?」
하자 공이,
「한(漢)나라 혜제(惠帝) 6년에 유후(留侯) 장량(張良)이 죽었다 함은 강목(綱目)에
적힌 바이니 어찌 신선을 따라가 죽지 않았을 리가 있으랴.」
고 대답했다. 이에 시험관들이 서로를 돌아보며 무인으로 어떻게 이것을 알고 있을
까 하고 경탄하였다.
서애(西厓) 유성룡 정승은 젊어서부터 공과 사이가 좋았던 분인데 항상 공을 대장
재목이라고 칭찬했다. 율곡(栗谷) 이퇴계 선생도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있을 때에
서애를 통하여 만나보기를 청했으나 공은 거절하였다. 같은 문중의 사람이니 한번
만나봄직도 했건만 그가 인재를 등용하는 인사업무를 맡고 있는 동안은 만나지 않
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공이 훈련원(訓練院) 봉사(奉事)로 있을 때의 일이다. 병조판서 김귀영(金貴榮)에게
는 딸이 있어 공을 사위를 삼으려 했다.
그러나 공은
「내가 이제 처음으로 벼슬길에 나섰는데 어찌 세도가의 집안에 발을 붙이랴」
하고, 당장에 중매 할머니를 쫓아 버린 일도 있었다. 공(公)은 변방의
장수가 되었을 때나 군관(軍官)이 되었을 때에 사리사욕한 일이 한 번도 없었다.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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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의 神道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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