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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주로 청소면 장곡리 장자울에 사는 박동진한테 배웠는데 오래 배운 까닭에 학식이
상당히 높아져 선생님과 동료들이 함께 다니면서 글을 지었다고 기억한다. 그러나 농업
이나 어업에는 소극적이었고 주로 글만 읽었다. 식구들이 바빠 소를 굶겨도 쇠죽조차 마
련하지 않았다. 하는 일은 마을 주민들의 혼서지를 써 주고, 당제 축문을 쓰고, 묫자리
를잡아주는일이었다.
빙도는고립된섬이기때문에학교에다닐수없었다.간혹학교에간친구들도중간에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가 한문에 재미를 붙여 천자문을 떼고 소학을 읽고 통감을
읽을무렵,6·25전쟁이그것마저할수없게하였다.
빙도마을은 사리 때 천북면 쪽으로 걸어 다닐 수 있었지만, 갯벌에 빠져야 건널 수 있
었기 때문에 점차 오천면 교성리 도미항과 통하게 되었다. 도미항까지는 불과 100여m
거리이지만바다가 깊어 나룻배가 필요하였다. 전쟁이 끝나고오천초등학교에 취학한학
생들에게 통학이 문제가 되어 학부형들이 교대로 나룻배를 운영하다가 이후 마을에서
관리하였다. 마을 사람들도 시장에 가야되고, 섬 밖에서 농사짓는 사람도 많았기 때문
이다. 나룻배는 전담으로 운영하는 사람이 있었다. 온종일 나루에 대기하고 있다가, 빙
도에서나가는사람이있거나,빙도로들어오는사람이있으면태워주는것이다.빙도로
들어오는사람은도미항의선바위에서있으면나룻배가태우러나갔다.
나룻배 사공에게는 마을에서 급료를 주었다. 현금으로 주지는 않고, 여름에는 보리
몇 가마, 가을에는 벼 몇 가마를 주었다. 당시 머슴 새경(머슴의 급여, 1년에 1번 주었음)
보다는 더 주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대신 마을 사람들은 무료로 태워주었고, 외부
에서 들어오는 사람한테는 배삯을 받았다. 처음에는 마을에서 배를 마련하였는데 나중
에는 보령군의 지원을 받아 만들기도 하였다. 주로 노를 젓는 무동력선이었고, 보령군의
지원으로발동선을운영하기도하였다.
빙도 주민들 중에서 그의 아버지 또래 되는 사람들이 작은 배를 가지고 천수만 안에
서 대하어장을 개발하였다. 현대 서산 AB지구 논이 있는 곳인데, 빙도에 사는 주민들이
개발하였다. 이곳에서 음력 3~4월에 자망을 이용하여 대하잡이를 했는데, 큰 소득을
보령시 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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