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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잊혀진시간을말하다3
마을주민들은보상을받은후이곳에정착하지않고전국곳곳으로흩어졌다.고풍리는현
재 외지에서 들어온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살고 있는데, 저수지 건설로 많은 주민들이 다른
곳으로 이주하여 마을 고유의 분위기가 사라진 것도 영향을 주었다. 저수지가 건설되면서
풍광이 좋아지게 되고, 서해안고속도로 서산 인터체인지가 개설되면서 접근성이 매우 좋아
져 서울에서 1시간 반 정도면 마을에 올 수 있다. 그래서 서산에서는 드물게 전원주택단지
가개발된마을로,현재는오래전부터살아온주민보다외부에서들어온이들이더많아외
지인이이장을맡은마을도있다.
저수지 건설에 마을 주민들이 상당수 참여했다. 전문 기술자를 도와주는 보조 인력으로
참가하였고 토차에 흙을 퍼담아 운반하거나 등짐으로 돌을 날랐다. 마을 주민들은 품삯을
받아 살림에 보탬이 되었다. 저수지가 건설된 후 수세를 걷었지만 고풍리는 수세를 내지 않
았다. 마을이 저수지 상류에 위치하여 저수지 물을 굳이 이용하지 않아도 농사가 되었고,
농토가 그렇게 넓지 않은 탓도 있었다. 해미의 홍천리, 관유리, 삼송리와 운산의 거성리, 상
성리, 소중리, 가좌리, 음암의 도당리, 탑곡리, 당진의 대운산리, 사기소리 주민들이 수세를
낸것과는다르다.
고풍리는 모두 5개 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중 5반은 한센인들이 사는 마을로 고풍저수
지 반대편에 위치한다. 종교인이 한센인을 위하여 건설한 마을로 별로 소통이 없다가 최근
에 와서는 서로 소통하려 애쓰고 있다. 고풍리 3, 4반이 저수지 건설로 수몰된 마을로 신기
하게 보상을 받은 주민 중 다시 고풍리에 정착한 이는 한 사람도 없다. 고풍1, 2리가 고풍1
구이고,고풍3,4리가고풍2구여서고풍2구가사라진마을이된셈이다.
고풍리의마을을군자동,고색동,고빛마을로나누어부르기도한다.고색동,고빛마을로
부르는 이유는 알 수 없다고 한다. 이중에서 수몰된 마을은 군자동으로 45여 호 정도의 마
을이었다. 고색동은 양지뜸, 음지뜸으로 나누어 부르기도 했다. 마을 주민들은 덕산장, 고
덕장, 면천장, 예미장(여미장)을 보러 다녔다. 고덕장이 가장 컸고 예미장이 가장 작았다. 고
풍리는마을전체길이가8km에이를정도로길게형성되어있다.
서해권 씨는 이를 일러 ‘칠레 같은 마을’이라고 했다. 고풍리에 마을 경로당이 있지만 아
래 쪽 마을 주민들은 거리가 멀어 이용하기 불편했다. 그래서 서산 시장에게 부탁하여 고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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