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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양하고 임오년(1642) 사사로 척신(戚臣)에 가 있다 부학(副學 : 부제학)의 명이 있어 성안에 들
어가 사은(謝恩 : 임금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사례하는 일)하고 오두리(홍성 갈산 오두리)에 돌아오다 대사간
을 세 번 제수하였으나 다 나아가지 않았다. 갑신(1644)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심양(瀋陽 : 당시 청
나라 수도)에서 돌아와 성 밖에서 맞이했다. 세자가 다시 심양에 들어가 공이 오두리에 돌아
오다 왕명으로 이부(吏部 : 상서)가 대신이 역모를 꾀하여 베일 것을 아뢰었나 마침내 오두리
로 돌아오다 대사헌에 제수했으나 다시 사양했다. 세자대군(世子大君 : 소현세자) 영원히 돌아온
다는 말을 듣고 곧 성안에 들어가 사배(謝拜 : 사은숙배)하고 세자 좌부빈객(佐副賓客)으로 벽제(경
기도 벽제)에 나아가 맞이했다. 그 후 병으로 사퇴하여 쉴 것을 아뢰었다 목욕하고 오두리에
돌아가니 다시 대사헌에 제수했다. 을유년(1645년)에 세자(世子 : 소현세자 청나라로부터 돌아와 얼마 안
있다 폭사했다)가 죽음으로 달려가 곡하고 길에서 시종(侍從)이 병이 있음을 듣고 의관에 뵈니
내세울 큰 병이 아니었다. 양사(兩司 : 사헌부)에서 체문(逮問)할 것을 청하니 재차 임금께 아뢰
어 옥당(玉堂 : 홍문관의 별칭)에 머물게 하고 그 피사(避謝) 처치가 근거가 없다하였다 공은 사은
하고 옥당의 실책을 논하고 또 의관을 말하는 것은 불가불 묻지 않을 수 없고 이에 인피(引
避 : 공동책임 지는 일을 피하는 일)하였다. 왕이 불러도 나아가지 안했다 체직되어 다 서전(西銓 : 병
조판서)으로 옮기었으나 상소하여 직책을 사양하였다. 상소의 글에 갑자년(1624)의 연고로 상
소가 결과가 없었다. 효릉(孝陵 : 인종과 인종비 능)제관으로 들어가다 낙상(落傷)하여 다시 일어날
수 없어 왕이 가마를 명하여 왔으나 병으로 오두리에 돌아오다. 왕이 제대신과 친견하여
전(前)일을 말하니 대간이 의관(의원)의 그릇됨을 체문(逮問)하기를 청하였다. 또 강가자(姜家子
: 인명미상)그 사위됨을 묻자 이로 인하여 내간일을 알 때에 자못 의관(의원) 이씨 성인(李姓人)에
게 말을 전하여 참설(讒說 : 남을 음해하는 말)이 있었다하나 구월 새로히 동궁(東宮 : 세자)을 책봉하
니 공이 호서(湖西 : 고향으로부터)로부터 궐에 들어가 하례하고 명년 몸에 무고(巫蠱 : 남을 혹독하게
자주하는 일 그런 사건) 옥사(獄事 : 죄를 가려내어 하옥하고 심문하는 일)가 크게 일어나 강서인(姜庶人 : 강씨 서
인)들이 사사(賜死)되고 문명(文明)은 공의 사위라 이에 왕의 교를 받고 공이 순천부사를 제수
받고 급히 나가니 도중에 수개월 간에 우차(牛車)로 죽은 자를 나르는 상(喪)에 곡송(哭送 : 울며
장송하는 것)하는 자 많아 문을 닫고 두려움에 밖에 사람과 더불어 접하지 않았다.(이것은 유행병
이나기타로인하여백성들이많이죽은일을말한듯함)
194_홍성의금석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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