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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잊혀진시간을말하다3
모두물에잠길형편이었다.그래서해미의몇몇사람들은저수지축조된후에비가오면다
른곳에가서자고오기도했다.하지만지금은이러한걱정은사라졌다.
저수지가 축조되기 이전의 산수리는 상당히 큰 마을이었다. 100여 가구가 넘던 마을로
사창벌, 시궁골, 아리랑고개로 이루어진 마을이었다. 이중에서 시궁골이 지금 저수지에 잠
긴곳으로상당히넓은들을가진마을로기억한다.마을에는당산또는닭산이라고부르는
높은 산이 있었고, 원두골·안골·앞사리골·영당골·시절골·가새골 등의 이름을 가진 골짜
기들이 많았지만, 지금은 아무도 이를 기억하지 않는다. 저수지가 건설되고 마을이 변하면
서과거를기억하는이들이모두사라졌기때문이다.
산수리 아랫마을 쪽은 과거에 사금을 캐는 마을이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사금광을 설치해두고 금을 모았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를 금방앗간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인근 마을에서 가장 먼저 전기가 들어왔고 금광을 하던 구덩이가 많았는데 지금은 모두 물
에잠겼다.
마을주민들은 모두 인근에서 가장 큰 해미장으로 장을 보러 다녔다. 인접한 홍성은 기차
가 통과하는 홍성역이 있어 주로 외지로 나갈 때 이용했다. 산수리에서 가장 경치가 좋았던
곳은산위에안흥정정자가있던곳이었다.안흥정에올라가면해미전체가내려다보여장
관이었다. 안흥정 앞에는 작은 샘이 있어 1년 내내 물이 마르지 않았다. 여름에 거기까지 걸
어 올라가 목욕을 하면 정말 시원했다. 여름 더위에 지쳐 피부에 땀띠가 나면 그 샘에 목욕
을 하여 가라앉히곤 했다. 지금도 정자는 남아있지만 관심이 적어 이를 해미의 명소로 개발
되기를바란다.
산수리에는 지금도 미륵불이 서있는데 여기에는 김태옥 씨와 관련한 기막힌 사연이 숨어
있다. 미륵불은 마을 도로가에 서있던 것으로 금줄을 드리고 애기 낳게 해달라고 비는 곳이
었다. 저수지가 건설되면서 수몰되게 되자 미륵을 아리랑고개로 옮겼다. 1980년대에 김태
옥 씨가 이장을 맡았을 때 마을 주민들과 협의하여 미륵을 20만원에 팔아 마을 농악에 필
요한악기를사기로하였다.
미륵을 팔자 사단이 생겼다. 정화위원회에서 문제를 제기하여 경찰에서 수사를 하게 되
고,군청문화재과에서도나서게되어김태옥씨가책임을지게된것이다.경찰서수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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