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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을 놓고 대한독립만세를 불렀고, 동서리에서는 김갑석과 홍철호씨 주도로 동서리와 상중
당을 사용하였고, 민청사무실은 이한직 가옥이라고 불리는 기와집에 두었다. 예산군 인민
리 사람들이 봉수산에 올라가 횃불을 들고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동서 · 상중리에서 횃불만
위원회에 참여한 조병언, 강찬희, 김만복은 모두 손지리 사람들로서 1930년대 대흥보통학
세운동을 주도한 김갑석 씨와 홍철호 씨는 붙잡혀 1주일 구류 살다가 일명 ‘쇠좆매’를 맞고
교 백지동맹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바 있다. 이들은 인천상륙작전 이후 인민군을 따라 북으
풀려났다고 한다.
로 향하였으나 천안 광덕산 부근에서 길이 막혀 되돌아오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대부분 체
1930년 1월에 예산농업학교 학생들이 광주학생운동(1929년)의 여파로 동맹 휴업을 계
포되어 경찰이나 우익치안대에 의해 처형되었다고 한다. 1952년 공보처 통계국에서 작성한
획하였으나 발각되었는데, 그 후 동맹 휴업 바람이 대흥보통학교에 불어왔다. 대흥보통학교
『6·25사변 피살자 명부』에 의하면, 예산에서 희생된 민간인은 247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6학년 학생 일동이 3월에 백지 답안을 제출하였고, 3월 11일에는 대흥보통학교 학생 20여
이 가운데에는 우익으로서 좌익에 의해 피살된 이들이 포함되어 있지만, 일부는 반대의 경
명이 대흥면 동서리 산 위에서 만세를 불렀다. 경찰은 이를 선동한 윤소현, 김창환, 배덕근,
우도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숫자 안에 포함되지 않은 이들도 많을 것으로
강성희 등을 불러 조사하고, 그들을 교사한 손지리 야학 강사, 중외일보 지국 기자 강찬희와
여겨진다.
김만복을 검속, 조사하였고 입침리 계몽학원의 강사 조병언과 대흥면 교촌리 강경희를 대흥
해방 이후 예산 지역의 지역 정치는 일제 시기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읍내의 지주 · 자
학교 생도들에게 동맹 휴교나 만세 부를 것을 종용하였다는 이유로 구속하였다.
본가층과 이들을 추종하는 읍 안팎의 일부 세력들은 우익으로서 독립촉성국민회, 민족청년
일제는 특별연성소를 설치하여 보통학교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을 모아 군사 훈련을 시켰
단, 대동청년단 지부 등을 만들어 활동하였다. 대체로 지방에서는 민족청년단이 많이 설립
다. 대흥면은 객사문에서 훈련을 시켰다고 한다(1년 4개월 정도). 특별연성소에서 우수한 사
되었는데, 동서리의 20대 청년들도 거의 다 민족청년단에 입단하여 예산 농협 마당에서 모
람을 뽑아 신체 검사하여 갑종 판정을 받은 사람들은 따로 훈련받았다고 한다. 그 중 한 사
여 교련 훈련과 단가를 부르고, 이범석 장군이 말 타고 대흥을 지나갈 때 환영식을 하기도
람인 노성한 씨는 시흥으로 가서 예비 훈련을 받고, 다시 용산으로 가서 예비 훈련 6개월 받
하였다. 그러나 조직에 비해 활동은 미미하였다. 예산 민족청년단의 단장은 윤병구 씨(광시
은 후에 집에 40일 정도 머물다 평양 대동강 제3훈련소로 가서 다시 훈련을 받고 일본 정광
면 출신)였고, 동서리의 단장은 김한유 씨였다. 민족청년단과 대동청년단은 1948년 12월 이
현(대판)에서 군 복무 하다가 해방을 맞이하였다고 한다.
승만에 의해 대한청년단으로 통합되었다가 2~3년 후에 자연 해체되었다. 반면 읍 밖의 지
한편 동서리는 일제강점기 급속한 인구 증가와 대흥면 소재지라는 행정적인 특성으로 음
역 출신으로 식민지 하에서 혁신청년운동에 관여했던 이들은 인민위원회, 조선공산당-남로
악과 연극이 상영되는 문화 중심지였다. 1930년대 조직된 대흥 밴드부는 예산, 광시, 덕산,
당 지부 등을 만들어 활동하게 된다. 여기서 예산의 좌우 대립은 읍내와 읍 외, 친일 · 보수
대천 등지에까지 연주 여행을 다녔고, 1932년 창설된 대흥 소인극 패는 매년 주민들을 대상
주의자와 사회주의자 간의 대립 구도로 되어 갔다.
으로 연극을 하였다. 이러한 전통은 현재 ‘의좋은 형제’ 축제와 마당극으로 계승되고 있다.
예산은 좌익 세력이 그리 강하지 않았다. 오히려 우익 세력이 더 강하였다고 보는 것이 옳
을 것이다. 그들은 주체적인 힘을 갖고 있었고, 객관적인 정세도 그들을 뒷받침해주었다. 다
만 좌우 대립의 강도가 다른 지역에 비해 훨씬 강하였다고 한다. 그것은 부재지주와 재지지
3)해방이후대흥의변화
주의 힘이 워낙 강하였고, 이는 결과적으로 소작 빈농들의 강한 반발 의식을 양성해왔기 때
문이다. 따라서 좌익 세력이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기반은 넓었다. 그러나 좌익 세력을 이끌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인민군이 예산에 들어오면서 인민위원회가 조직되었다.
수 있는 지도자들이 극히 소수였기 때문에 큰 세력을 형성하지 못하였다.
예산군 인민위원장은 조병언이었고(뒤에 금홍이 맡았다는 설도 있다), 강찬희 · 김만복 등
도 인민위원회에 참여하였다. 대흥면의 인민위원장은 안진철 씨였고 사무실은 상중리 공회
4.공동체사회와민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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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의뿌리예산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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