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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대사헌(大司憲)에 제수하니 사퇴하고 함경감사 목장흠이 광해군 시절에 예조 참의 서궁감
선 절목에 스스로 독간으로 처리한 죄의 실정을 논함을 진술 기록하여 올렷으나 왕이 답을
하지않자 곧 사퇴하고 자리를 옮기었다. 얼마 안있어 다시 전직(前職)을 제하니 또 사퇴하고
갑술년(1634) 부제학을 재차하니 사퇴하고 체질되었다. 원종대왕 추숭례(元宗大王 追崇禮 : 인조의
아버지를 추존하는 예)에 태실대신(太室大臣)을 합부(合 , 合祀) 하는 것을 대신이 힘써 간하니 왕이
심히 노하여 뇌성벽력 아래에 있는 듯 하였다. 감히 숨을 쉴새없이 대사헌 유백종(兪伯憎)이
알리자 왕의 뜻은 대각(臺閣)을 비어두고 논의가 그치자 다시 경연관의 수장을 뽑아 이에 전
부(銓副)를 보이니 총가군(寵嘉君)과 함께 관료 이상질(李尙質) 이시해(李時楷) 등이 샅이 추궁하고
논쟁하니 헌부(憲府 : 사헌부)가 시비를 분별하지 못하더라 왕이 엄한 교지를 내려 절색(絶塞 : 인
간의 발길 없는 곳 변방의 곳)으로 귀양보내라 명하니 처음에 회령(會寧 : 함경북도 두만강 가에 있는 회령군)
이되었다.
특별히 삼수(三水 : 삼수갑산 함경도 백두산 아래)로 옮기었다. 삼수는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고 물
과 흙이 심히 악하고 도로가 절험(絶險)하며 열발짝에 아홉 번이 꺾인 곳이 말도 걸어가지 못
하는곳이라십일동안걸어서유배지에당도하니엎어지고자빠져서자못그형상을들수가
없어실색하지않을수없었다.공이지키는바연고를보임이라(거할 곳이라) 조정에서이미정
한곳이라대신(大臣)이다시관전을베풀기를청하니왕이불허하였다.명년을해(1635년) 풍재
이상(風災異常)이라묘사(廟社)와릉침(陵寢:왕릉)의큰나무가뽑이었다.
천심이 비로소 축신(逐臣 : 내쫓아버린 신하)을 다 원래대로 하고 뉘우치다. 병자년(1636) 유월에
서서군직(西敍軍職)하고 팔월 호조 참팜을 제수하고 겨울에 금나라 사함 유( )가 나라와 맹
약할 것을 들어 나라에 들어와 수일도 안되어 경기도 내 전해지니 왕이 강화도에 행차하니
적병이 이미 서교(西郊 : 서쪽지방)에 이르니 급히 남한산성에 피하여 들어가니 공이 호종(扈從)
하여 성에 들어갔다. 선은(先恩)으로 늙고 병든 신하도 따르라 교시하니 종묘가 강화도로 가
니 의정공이 풍현(風眩 : 병환)의 고통에도 따라가니 강화도에 이르러 성(城)을 지키는 것을 잃
고 나라의 형세가 이미 기우러 지는 것을 보고 성문에 올라 유황에 불을 붙이고 그 불을 가
지고 맹서하기를 오랑캐 청나라 군사를 보지 않기로 하고 불을 놓고 스스로 분신 자결하니
정축년(1637) 정월이십 이일이라 때에 왕의 행차가 또 성을 나가 적군의 진에 가니라. 공(公)
192_홍성의금석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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