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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허굉은아뢰기를,
“자질이 용렬한 사람은 나약해지기 쉬우니, 위에서 장려하여 양성하면 사람
마다 다 보고 느껴서 분발할 것입니다. 처음에는 향방을 모르는 자라도 한
대의 추향(趨向)을 보면 반드시 선한 데로 돌아갈 것이니, 모름지기 조정의
기풍과습관이시들어지지않게하는것이좋습니다.”
하였다.
◎1518년(중종13)10월23일(기축)
야대에 나아갔다. 시강관 김구가《근사록(近思錄)》의 동정(動靜)에 대한 말
에 의하여 동정의 이치를 극력 진달하고, 마침내‘임금의 동정은 법도에 벗
어나서는 안 되고 더욱이 경솔해서는 불가합니다.’하고 풍간(諷諫)하였으
니, 아마도 주상의 걸음걸이가 혹 조용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김구의 말이
이와같았던것이리라.권벌이아뢰기를,
“국가의 원기(元氣)는 널리 퍼지도록 해야 하니, 사기(士氣)가 꺾이지 않은
뒤에야 근본이 공고해집니다. 요즈음 예조(禮曹)의 공사(公事)를 보면 정몽
주(鄭夢周)의제문을짓기를청하였으니이는아름다운일입니다.
사정(私情)으로써 말하면 당초의 인심이 태조(太祖)에게 돌아갔는데, 마침
232)
세자(世子)
가 경사(京師)에 갔다가 돌아올 때 태조와 태종(太宗)께서 마
중나가 외방에 계셨습니다. 정몽주가 인심이 태조께 다 돌아감을 보고 대간
(臺諫)을 사주(使嗾)하여 태종께 붙은 조준, 정도전, 남은(南誾)들을 다 내쳤
습니다. 이때 태조께서 해주에서 사냥하시다가 말에서 떨어져 부상하였으므
로 풍양(豊穰)에 돌아오셨는데, 정몽주가 조준 등을 귀양 보내었다는 말을
태종께서 듣고 태조께 아뢰어 병환을 참고 서울【개성을 말한다.】에 들어오
게 하였으니, 형세가 정몽주와 양립(兩立)할 수 없으므로 정몽주를 제거하
였습니다. 이것으로 보면 정몽주는 우리나라의 원수와 같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을포장(??)하고존숭하여야강상(綱常)이크게밝아집니다.
옛날 한 고조(漢高祖)는 사정(私情)이 없는 임금이 아니었지만 정공(丁公)을
232)공양왕의세자석(奭)
7장조선왕조실록에기록된내용│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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