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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칭하기를 극선인(極選人 : 최고로 뽑힌 자)이 하더라 예문과 검열 겸 사관에 승진하여 천계(天
啓 : 명나라 연호) 갑자(甲子 1624년) 이괄(李适)의 반란 일을 기록하였다. 왕이 장차 공주로 행행(行幸
: 임금의 행차 곧 왕이 공주로 피란함)하니 사관(史官)을 옮길 것을 명하였다. 일기가 일이습하여 결과
없이 파하고 다시 교시를 기다려 서술하고 교서를 받들어 승정원 주서로 옮기고 성균관 전
적 새 사헌부 감찰이 되고 을축년(1625)에 시강원 사서로 옮기고 또 사간원 정언으로 옮기고
홍문관 수찬지체에 제수하니 사양하고 승진으로 부교리를 제수하고 군직(軍職)으로 바꾸고
또 강수찬(講修撰)을 제수하고 문과 중시에 오르고 교리헌납(郊理獻納)에 제수하니 병으로 사퇴
하고 명년에 오품(五品)으로 말미암아 인망(人望 : 세상에 덕망있고 존경하는 일)을 따른 것이다. 정묘
(1627 인조 5년) 청나라 군사가 임노하니 왕을 호위하여 강화도에 갔다 돌아 왔다 부교리에 제
수하고 병조 정랑에 옮기고 일의 연고로 곧 정랑(正郞)에 제수하니 일의 틈을 타니 전하기
를 횡성현에 백성 중에 이 인거가 반역을 꾀한 일에 종훈(從勳)을 물어 허유 정심등을 가두
었다는 일을 기록하고 추관록(推官錄 : 죄인 추국하여 기록한 것) 정훈 교리 직강 이조정랑을 제수하
고 중시은초승종부정으로 중용되고 집의(執義 : 사헌부 종삼품)로 옮기고 또 보덕(輔德 : 세자 시강원
종삼품)으로 옮기고 기사(己巳 1629년) 정월 암행어사가 되어 호서(湖西)를 안시(按視 : 살피고 안무하다)
할세 수령(고을원님)의 불법을 살피고 돌아오다 응교(應敎 : 홍문관 직제학 예문관)가 되고 오월에 또
구황어사(救荒御史 : 흉년으로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는 벼슬)로 경기도 지방을 순역하여 읍에 구황(救荒 :
주리고 부황나고 고통받는 백성을 구제하다)한 바가 자못 많다. 칠월에 드러와 다시 옥당(玉堂 : 홍문관의
별칭)에 들어가고 겨울에 대신들이 천거하여 사인(舍人 : 문하사부의 내사 사인 정사품)으로 제수하고
집의(執義 : 사헌부 종삼품)필선으로 옮기고 반년 중에 삼사번 옮기었어도 옥당 동벽 정부랑서
간원사유 겸직에 나가지 아니하였다. 경오년에 목능(穆陵 : 동구릉의 하나로 선조와 선조비 의인왕후 계
비 인목왕후의 릉 양주에 있음) 개장(改葬 : 고치거나 이장하다)하니 도청랑(都廳郞)이 되어 일을 감시감독하
여 마치니 왕이 통정(通政)의 계급에 승진 제수하고 장예원 판결사를 제수하고 호조참의 유
지부 역추관(戶曹參議由地部歷秋官)과 하관참의참지춘추관우시랑동부우부승지(夏官參議參知春秋官右
侍郞同副右副承旨)에 옮기고 재차 장간원(長諫洹 : 사간원)으로 인목왕후(仁穆王后 : 선조의 계비왕후)상에
비명(碑銘) 정 두전(頭篆 : 비석 맨위에 전서로 횡서하는 글씨) 쓰고 가선대부(嘉善대부)에 승진하고 한성
우윤겸부총관을 제수받고 명년 봄 삼월에 간장(諫長 : 사간원의 수장)되었으나 사퇴하였다. 유월
홍성의금석문_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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