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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이 임명되었다. 주재소나 우체국 소장은 일본인이 임명, 파
아 경제, 사회, 문화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견되었다. 특히 스가와라는 대흥면 우체국장을 30여 년간 재임
한편 토착 세력들은 기껏해야 중소 지주 내지 부농 정도에 지나지 않았고, 대지주 · 자본
하면서 동서리에서 살았다고 한다.
가층과 경쟁할 수 없었던 것이다. 토착 세력의 후예들은 1910년대와 1920년대 각 면에 설
한편 행정구역 개편은 주민들의 구성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
립된 보통학교에서 신교육을 받기 시작하였고, 외지로 나가 인텔리층이 되어 돌아오기 시작
왔을 것이다. 조선시대의 신분별 거주지 구분이 와해되고, 향리
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일제의 지배 기구에 편입되어 들어가기도 했지만, 일부는 민족 운
[그림5]동헌의현재모습
들의 직역 세습이 단절되면서 향리들과 관아에서 일하던 사람
동과 사회 운동에 참여하면서 일제에 맞서기 시작했다.
들은 어떻게 변신하였을까? 현재로서는 추적하기가 어렵다. 상
2)사회활동,문화생활의중심지,동서리
층 이임직에 있던 향리들은 실무 행정 능력을 인정받아 일제 통
치 아래에서 면 행정을 담당하고, 자녀들을 근대 교육 기관에 보
내어 행정 관료 등으로 진출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동서 · 상중
대흥의 사회 단체는 진흥회, 임존구락부 등이 있었다. 진흥회는 일제가 관료-유지 지배
리에 거주하면서 하층 이임직이나 사령, 관노를 지냈던 사람들
체제를 형성한 후 농촌 진흥 운동을 효과적으로 실시하기 위해 각 지역별로 조직한 관변 단
은 새로운 일거리를 찾거나 자신의 신분을 감추기 위하여 다른
[그림6]대흥보통학교1회졸업사진
체로 미풍양속 보호 및 유지, 지방 개량 등을 목적으로 하였다. 대흥의 진흥회도 마찬가지로
???출처:충남대마을연구단
지역으로 이주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미풍양속 보호 목적으로 효행 인물 표창식을 거행한 바 있고, 초대 회장은 박승돈이 역임하
일제 강점기 대흥면은 대흥군 시절의 향리와 관노, 사령들의
였다고 한다. 임존구락부(任存俱樂部)는 1926년 7월에 대흥공립보통학교에서 창립총회를
거주지에서 대흥면 소재지로 변신하여 근대 행정, 상업, 교통의
하였고, 강령(綱領)을 제정하고 활동하였다. 임존구락부의 강령은 부원간 상호 친목도모,
중심지가 되었다. 일제강점기 주도 세력은 사회경제적 조건과
지덕체(智德體)의 향상, 지방 발전 사업에 이바지하는 것이고, 충남소년정구대회를 주최(동
관련하여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일제 강점기 예산은 신흥 상
아대흥분국 후원)하기도 하였다.
업 도시로 성장하면서 각지에서 지주와 상인들이 모여들었다.
대흥의 민족 운동과 사회 운동은 대흥공립보통학교에서 시작되었다. 대흥공립보통학
읍내의 아전 세력은 식민지화와 더불어 거의 묻혀버리다시피
교는 예산 지역에서 제일 먼저 설립된 보통학교로 1911년 9월에 개교하여 1915년에 첫
[그림7]대흥보통학교10회졸업사진
되었고, 읍 밖의 양반층이나 평민층 가운데 비교적 부호에 속했
졸업생 21명을 배출하였다. 1회 졸업생 가운데 박헌영과 윤돈구가 대표적이다. 박헌영
던 이들도 읍내의 신흥지주 · 상인층과는 경쟁이 되지 않았다고
(1900~1955)은 대표적인 공산주의 운동가로 성장하였고, 윤돈구는 대흥의 대표적인 지주
한다.
로 천석꾼이었다고 한다. 대흥공립보통학교는 1924년에 운동회를 열고, 첫 졸업생을 배출
대흥도 마찬가지로 읍 밖의 양반층이었던 유력 성씨들이 대
한 지 10년만인 1925년에 동창회를 만들기도 하였다. 동창회의 회장은 교장이고, 부회장은
흥면의 중심지인 동서리로 이거해왔다. 당시 대흥면의 주도 세
수석 훈도였다.
[그림8]대흥향교
력은 일명 ‘삼돈’이라 불리우는 윤돈구(해평윤씨), 이범돈(전주
1919년 3.1운동 때 예산에서도 곳곳에서 시위가 일어났다. 3월 31일 예산면에서 장날 오
이씨), 박승돈(반남박씨) 등이다. 이들은 대흥의 유지로 진흥회
후 2시쯤 장꾼 일동이 만세를 부르며 헌병대 앞까지 진출하였고, 4월 4일 밤 10시부터 예산
같은 사회 단체를 조직하여 회장을 역임하거나 대흥상회 발기
면, 대술면, 오가면, 신양면, 고덕면, 대흥면의 15개소에서 군중들이 봉화를 들고 시위를 전
인으로 참여하였고, 동아일보 예산지국 대흥분국 고문 등을 맡
개하였다. 이때 대율리에서는 정인하의 주도로 마을 사람 10여 명이 마을 동쪽 산에 올라 횃
4.공동체사회와민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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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의뿌리예산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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