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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잊혀진시간을말하다3
그런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땅이나 집이 수몰된 많은 마을 사람들은 시위로도 자신들의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대부분 마을을 떠났다. 물론 농지가 수몰되었어도 주변 마을로 거
주지를옮겨아직살고있는사람들도있다.
저수지가 만들어진 이후 경지 정리도 이루어졌지만, 공유지로 배수로까지 내주어야 하니
손해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한다. 거기다 저수지가 새로 생겼다고 수세가 면제되는 것도
아니었다. 물론 수세가 부담될 만큼 높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저수지 주변 홍수지를
정부가매입한덕에싼도지로혜택아닌혜택을받는경우도있었다한다.
사실 성암저수지가 마을에 큰 도움이 된 건 아니다. 김휘일 어르신은 이걸 ‘폐도움’이라
하신다. 마을의 좋은 땅은 저수지에 들어가고, 인구도 줄고, 경관이 좋다고 집을 짓고 새로
들어오는 사람들은 농사를 짓지 않는 외지인이 대부분이다. 거기다 용머리산이라고 불리던
작은 구릉 하나도 이제 다 깎여나가 흔적도 찾기 힘들다. 대부분의 저수지에 있는 용구멍
혹은용머리전설과연결되는이름이었지만,개발로인해남은것이없기때문이다.
성암저수지의 소류지, 즉 배수지가 있는 성암리는 성암저수지를 바라보는 시각이 많이
다르다.부장3리와성암리는인접해있기때문에마을사람들끼리교류가분명하다.하지만
저수지에대한입장차이는분명하다.저수지덕에덕을많이본것은성암리쪽주민들이기
때문이다.
저수지 아래 농지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큰 도움을 본 것이 분명하다. 저수지 덕에 가
뭄 걱정을 덜뿐더러 홍수에 대한 걱정도 함께 덜었기 때문이다. 저수지가 넘치면 안 되니 물
관리 만큼은 철저히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성암리 쪽에서는 방죽마을에 있던 저수지가 성
암저수지덕에필요가없어지면서,새롭게농지로개간이되어덕을본경우도있다고한다.
부장3리에 마을 공동체에 관한 기억이 그리 많지 않은 것과 반대로 성암리에는 다양한
기억들이 남아있다. 성암리에는 칠성바위라고 7개의 바위가 있었다. 마을 이름 성암(星岩)의
유래와도관계가깊다.특히저수지둑방밑에커다란집채보다더큰바위가3개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저수지가 만들어진 뒤, 정확히는 1986년에 경
지정리를 하면서 바위를 농경지에서 들어낸 다음, 다시 깊이 묻어버렸기 때문이다. 이성구
이장님 어린 시절 기억에는 그 바위들의 이름이 있었다 한다. 아버지 바위, 할머니 바위,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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