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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참판수북선생김공신도비명
유명(有明)은 명나라가 망했어도 청나라를 섬기지 않고 존화양이(尊華 夷)로 명나라 마지막
연호를 사용하였음. 즉 숭정원년 1628 이후 고종황제까지 비석문에 사용했으며 숭정년호
즉1628년이전의비문에는없음.
조선국가의 대부 이조 참판겸 오위도총부 부총관 세자 좌부 빈객 수북 김공 신도비명(병
서) 고(故) 대사헌 김군 광현의 자(字)는 회여(晦汝)요 우리 백씨의 정공의 제 셋째 아들이라 육
십사세 죽으니 호서 결성현 신복지산 오향(午向)으로 장사지내다 명년에 그 아들 수인(壽仁)
등이 비명(碑銘 : 비문)을 지어줄 것을 청하거늘 내가 말하데 고인(古人)은 형제의 족하라. 무
릇 비명에 아름다운 덕을 칭하고 칭하지 않고는 어찌 그 덕과 선행과 공이 나타남을 논하
여 지으리오. 추세에 나의 말이 어찌 남에게 믿음이 족하겠는가. 비록 그러나 또 일찍이 들
으니 진자금(陳子禽)이 말하길 군자는 그 아들이 원하는바 배움을 멀이 하는 자라 이것은 홀
로 성인에 있지 않겠는가? 드디어 지어 이르기를 우리 김씨는 시조는 신라에 나타나서 벼
슬을 하고 고려시에 휘(諱) 선평(宣平) 고창의 성주(城主)가 되어 군병(郡兵)를 거느리고 견훤을
패주 케하여 삼중 대광 태사(三重 大匡 太師)가 되어 권행(權幸) 장길(長吉)은 사직에 세사(世祀) 지
금까지 끊어지지 않고 이어졌다. 자손은 칠백여년동안 거하며 서로 이어져 오다가 고조 휘
(諱) 번( )이 평양부사윤을 지내고 증이조 판서이시다. 증조 휘(諱) 생해(生海극) 신천군수 증좌
찬성 조부 휘(諱) (克孝) 돈령부도정(敦寧府都正) 증영의정 부친휘(諱) 상용(尙容) 의정부 우의정 정
축지란(丁丑之亂 : 1637년 청나라 침입)에 강화도에서 순절하니 그 정문(旌門)에 이르기를 충신지문
(忠臣之門)이라 하였다. 비(
: 모친) 정경부인 권씨 영의정 철(轍 권철)의 손자 좌랑(佐郞) 개(愷)의
딸이다. 만력(萬曆) 갑신(만력 갑신은 1584년) 구월에 김광현을 낳고 십일세에 모친상을 당했다.
증 의정공(상용)의실(둘째부인) 정씨에게 무양(撫養 : 기르다)을 명하고 이미 장성하매 진사 심율(沈
慄)의 문하에 들어가 배우고 임자년(1612) 가을에 생원 진사 양시험에 연하며 합격하니 이로
부터 세상에 길이 어두워지고 막혀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공은 시골에 배회하였다. 계해
(1623년) 국가반정(국가에 부정하는 자) 찾아내고 수사하는 전사(銓司)에 천거하여며 충청도 연원(連
源) 찰방에 제수하니 나아가지 안했다. 문과 정시에 합격하고 사국선예괴원(史局旋 槐院 : 사
초를 꾸는 실록청)에 천거하고 또 옥당(玉堂) 남상위(南狀位 : 홍문관 정자의 별호) 벼슬에 천거되니 세상
190_홍성의금석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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