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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2019
제53호
제53호
지역학칼럼
예산학특강-내포지역의개신교전래
대 지배층으로서의 위트 넘치는 고급의 한국어는, 그를 요즘으로 치면 ‘스타 강사’로서의 반열
만열악한상황에서몸이갑자기쇠약해지자1925년11월귀국하여1926년부터3년간천안교회
에오르게만들었다.그의설교에감명을받은교회의젊은이들이그에고무되어4-5명의학생이
를 시무한 후 1929년 1년 동안은 예산교회를 돌보았다. 예산과의 짧은 인연이었다. 1932년 중국
일본유학을떠났다고한다.이어서최성모는1916년서강교회를떠나해주남본정교회담임으로
대련에서 선교사업을 재개했던 그는, 신병으로 다시 귀국하여 1937년 사망하였다. 그의 유해는
부임하였다.
지금대전현충원애국지사묘역에안장되어있다.
최성모가 해주에서 서울로 올라온 때는 1919년 2월 25일이었다. 그 날 밤 전부터 잘 알고 지내
던 YMCA 간사 박희도에게 3.1운동 민족대표 동참 제의를 받은 그는 그 자리에서 이를 수락하였
다. 1907년 전덕기 목사의 강연에 감동 받은 이후 이제 10년 이상 기독교구국운동의 길을 걸어온
그에게 삼일운동 참여는, 너무나도 당연한, 선택의 여지가 없는 크고도 소중한 일이었다. 3월 1일
오후 두 시 최성모는 약속 장소인 명월관에 도착했다. 만해 한용운의 선창으로 만세를 부른 후 경
찰이 들이닥쳐 최성모 등 민족대표들을 체포, 수감하였다. 그로부터 그는 2년 8개월 동안 투옥되
어고초를겪었다.
최성모는 재판 과정에서 인간으로서 반드시 보장받아야 할 기본권을 주장했다. 천부인권의 가장
핵심가치인 자유권을 전제로 하여 조선 사람들에게 저작과 여행은 물론 언론과 교육의 자유가 없
음을 일갈했다. 성리학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개화기 지식인을 거쳐 근대 민족운동가로 신속하게
이동하며 시대정신의 부름에 응했던 그의 삶의 궤적이 짧은 진술의 행간에서 읽혀진다. “조선 사
람에게는자유가없다.”
최성모는 출옥 직후 서강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그가 1914년부터 2년 동안 초임 목회하
였던바로그교회였다.당시최성모가뿌렸던씨앗은그후삼일운동에서여지없이결실로돌아왔
다. 서강교회는 고양군 삼일만세시위의 주요한 동력이었고, 그 주모자들은 학창 시절부터 최성모
의영향을받은그룹이었던것이다.삼일운동이후서강교회는한때모든집회가금지되고교회지
도자들이투옥또는피신하는등어려움을겪었다.
그는서강교회담임목사부임약1년후인1922년9월다시상동교회로파송받았다.상동의교
인들에게는 참으로 감개무량한 인사가 아닐 수 없었다. 이필주 전도사의 권유와 전덕기 목사의 감
화로 상동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던 그가, 결국 목회자가 되고 삼일운동에 가담하여 옥고를 치른 후
모교회로 돌아와서 목회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는 전덕기 목사의 유지를 가장 분명하고
선명하게 계승한 인물이기에 교회 앞에 조금도 부끄러울 것이 없었다. 상동교회 목회 시절 그는
‘진사목사’로불리며교인들의사랑을한몸에받았다.최성모의생애에있어가장빛나는순간
이었다.
최성모는 1924년 상동교회를 떠나 만주 봉천으로 임지를 옮겨 선교하였다. 그가 안정적인 목회
환경을뒤에두고갑자기서울을떠난것은아마삼일운동지도자로서일제의집요한압박을받은
결과가아닌가한다.또해외에서독립운동을하려는민족적인동기도작용한것으로보인다.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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