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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하여53칸짜리집을짓게하였다.이것이오늘날추사고택으로불리는월성위집안의향저(鄕
邸)이다. 현재 충남 예산 용궁리에 있는 추사고택은 1976년 추사고택 정화사업으로 53칸 집을
5)
반으로줄여복원한것이다.
6.화암사의중건
ㆍ개요(synopsis)
예산오석산의화암사는추사가문의원찰로추사글씨와학문의고향과도같은곳이다.뒤뜰병
풍바위에는 시경, 천축고선생댁이 새겨져 있고 지근거리에는 소봉래가 있으며 시경루, 무량수
각, 추수루 등 추사의 흔적이 곳곳에 배어있는 추사를 아는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매우 중요한
곳중의한곳이다.때문에추사는유배중임에도중건을지시하고직접상량문을지어보내기도
했던것이다.
ㆍ내용(contents)
예산 오석산(烏石山) 화암사(華巖寺)는 경주김씨 집안의 원당사찰(願堂寺刹)로, 현판은
월성위 김한신이 쓴 것이다. 화암사가 언제 초창(初創)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1752년(영조
28)영조의부마인월성위김한신이이절을중창하면서추사가문과인연을맺게된다.김한신
은영의정을역임한그의아버지김흥경의묘역을용산의앵무봉자락에쓰고오석산에있던화
암사를 원찰(願刹)로서 중건했던 것이다. 이는 별사전(別賜田)으로 내려 받은 일대의 전토(田土)
와함께추사가문에세습되게된다.그후월성위와화순옹주도용산앵무봉아래에묘역을마련
하게된다.
절이낡게되자90여년뒤인1846년(헌종12)에증손자인산천김명희(金命喜)가영파대사와함
께약사암을비롯해무량수각과선실,요사채등을중건하여절을일신하였다.이때절의규모가
50여간에거소대중이50여인이나되는작지않은규모였다고한다.당시추사는제주에유배중
이었는데,문집에는가남아있다.그리고둘째동생상희에게보낸여덟번
째편지에는화암사중건에대해다음과같이언급한내용이남아있다.
사역(寺役)은근간에과연어떻게끝마친단말인가?그를위하여매우염려가되네.편액새기는
일은의당도모해야하는데,이곳에새김질을잘하는사람이전번에이미죽었으니,이것이대단
히걱정이네.다른사람들이없는것은아니나모두가그사람솜씨에는미치지못하네.상량문(
上梁文)은비록반(潘)ㆍ육(陸)ㆍ임(任)ㆍ유(庾)의솜씨에다부합되지는못하나,긴투식의성어(成
語)는없으니그것이오히려좋을뿐이네.(사계(舍季)상희(相喜)에게보낸8번째편지)
대개 들으니 수달(須達)의 구천정사(九千精舍)는 신심(信心)이 기원(祇苑)의 성금을 보시(布施)하
고,아육(阿育)의백만부도(浮圖,탑)는신력(神力)이천궁(天宮)의공장(工匠)을대행하도다.이는
5)유홍준,『완당평전』1,학고재,2002,30쪽.
2016 50호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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