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36페이지

16페이지 본문시작

읽고 죄스러움에 가슴 절절하던
때에 이뤄졌으며, 그 후 당진군
에서‘시인 윤곤강 묘소 입구’
라고
쓴 스텐레스 안내판을 만들어 큰길가
옆에 세워주기도 했습니다.
여기에 오기까지는 박만진 시인의
헌신적인 도움이 컸습니다. 변변치
못한 유가족들은 아버지의 문학
적인 자료를 아무 것도 갖고
있지 못했었는데, 박만진 시인이
백방으로 수소문하여 <윤곤강
시선집>과 시론집 <시와 진실>을
펴내는 등 서산시의 도움으
로 서산시 문화회관에 아버지의
왼쪽에서 두번째 - 필자 (둘째딸 / 윤명순)
시비(
)까지 세워주셨으니,
그 고마움을 오로지 가슴 깊이 새기고
있을 뿐입니다.
아버지께서 광복과 더불어 혼돈한 사회에서 이데올로기와 파벌, 갈등과 반목으로 살기 어려운 시기에
끼니도 제대로 잇지 못하시고 신문과 잡지에 글을 쓰시느라 매일 밤잠을 설치신 때문에 피로가 겹치고
겹쳐 어느 해 여름 탈진하여 쓰러지신 뒤 병석에 눕게 되신 것입니다. 요즘만 같아도 의학이 발달하여
쉽게 고칠 수 있는 병이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서울 내수동에 있는 김근배 내과의원에서 왕진 치료를 받는 등 한약도 드시곤 했는데 별 차도가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그때만 해도 할아버지께서 1,500석지기의 큰 부자였
었는데 왜 큰 병원에 입원시켜 드리지 않고 집에서 병간호를 했는지 궁금하기 그지없습니다.
돌아가신 병명이 척추염 및 신경쇠약이라고 했습니다. 밤낮을 불구하고 원고를 쓰시느라 책상에 늘
앉아계시다가 척추염이란 지병을 얻은 것일 테고, 잠을 제대로 주무시지 못한 까닭에 피로가 쌓이면
신경이 곤두서서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의 본명은 윤붕원(
)입니다. 가끔은 책자나 신문에서 아버지 약력을 소개할 양이면
벗 붕( )자를 밝을 명( )자로 오기( 記)하여 윤명원(
)이라고 소개하는 것을 보아 온 때문
에 바로잡고자 말씀드립니다.
해방이 되고 아버지께서는 보성고보에서 교직 생활을 하시다가 성균관대학과 중앙대학에 출강하셨
습니다. 그때만 해도 안국동에 가야 혜화동으로 가는 버스가 있고, 중앙대학은 화동에서 종로까지
걸어가서 전차를 타고 노량진에서 내려 흑석동까지 다시 걸어서 출퇴근을 해야 했습니다. 집에 돌아오
시게 되면 새벽 3시까지 원고를 쓰시느라 편히 주무시지를 못했습니다.
16 |
2011_05

16페이지 본문끝



현재 포커스의 아래내용들은 동일한 컨텐츠를 가지고 페이지넘김 효과및 시각적 효과를 제공하는 페이지이므로 스크린리더 사용자는 여기까지만 낭독하시고 위의 페이지이동 링크를 사용하여 다음페이지로 이동하시기 바랍니다.
상단메뉴 바로가기 단축키안내 : 이전페이지는 좌측방향키, 다음페이지는 우측방향키, 첫페이지는 상단방향키, 마지막페이지는 하단방향키, 좌측확대축소는 insert키, 우측확대축소는 delete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