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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 첫째와 둘째, 셋째아들이 가내리에 살았다. 넷째와 다섯째 아들은 충북 괴산으로 가서 이후 괴
산과 제천 등지에 그 후손들이 살게 되었다. 가내리 지역의 후손들은 가내리를 중심으로 선장면 신동
리와 선창리, 인주면 해암리, 용화동, 홍성, 충북 청주, 서울 등 각지로 퍼져서 살고 있다.
김근직의 묘는 신창면 가내리에 있었으며 그 자리에 10여 년 전에 납골당을 만들어 그의 후손들과
함께 모시고 있다.
[14] 경주김씨 김덕원
| 金德元
<1546년(명종 1년)~1596년(선조 29년)>
조선 중기의 인물로 경주김씨(慶州金氏) 52세(世), 경순왕 25세, 정숙공파(貞肅公派) 13세이며 정
숙공파 아산시 지역, 염치읍 백암리 구무골 입향조이다. 현재 옆 마을인 용두리에 거주하는 정숙공파
25세 김규방(75세)씨의 12대조이다.
김덕원은 통훈대부 김중은(金仲隱)의 현손이고 영암군수 김우완(金雨 )의 증손이며 부사직 김영호
(金永瑚)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현감을 지낸 김근신(金謹臣, 1510~1554)이며 어머니는 문화유씨(文
化柳氏)로 진사 유승형(柳承亨)의 딸이다. 선조들은 경기도 안성 양성면 지역에 거주해왔다.
그는 아버지가 늦은 나이인 37세 때, 어머니 36세 때 낳은 귀한 아들이었다. 그러나 그가 8세 때 어
머니가 돌아가시고 이듬해 아버지마저 세상을 떴다. 그는 염치읍 대동리 황골에 살던 고모에게 와서
자랐고 혼인까지 하게 되었다. 부인은 신창맹씨(新昌孟氏)이며 판관 맹의선(孟義善)의 딸이다. 사직
공 맹석경(孟碩卿)의 손녀딸이기도 하다. 맹의선이 염치읍 백암리 구무골에 거주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김덕원은 혼인 후 1570년부터 황골에서 가까운 구무골에 거주하기 시작했다. 약 440년 전의
일이며, 이후 그의 후손들이 염치읍 일대를 중심으로 각지로 퍼지게 된 것이다.
김덕원은 자가 인보(仁甫), 호가 미암(美庵)이기 때문에 후손들은 그를‘미암공’
으로 칭하며‘미암
공파(아산파)’
로 구분한다. 무공랑(務功郞-정7품)을 거쳐 병조정랑(정5품)에 올랐으며 뒤에 가선대
부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묘는 염치읍 강청리에 있다.
그는 정현(鼎鉉), 태현(台鉉), 내현(
鉉) 등 세 아들을 두었다. 큰아들 김정현은 부인 우봉이씨(牛峰
李氏) 사이에 1남3녀를 두었다. 무과에 급제한 뒤 진주진 병마우후를 지내던 35세 때 정유재란의 제
2차 진주성 전투 중에 전사했다. 둘째아들 김태현은 선교랑으로 행현릉(顯陵)참봉을 지냈으며 후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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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입향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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