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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김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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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다. 본관은 김해(金海)며 김해
김씨 아산 죽동(竹洞-대동) 입향조다. 충간공 보(普)의 손
자이고 달문(達門)의 아들이다. 부인은 해주 최(崔)씨이다.
자는 회지(會之)이다. 벼슬은 사재감정(司宰監正-정3품)
을 지냈다. 뜻과 행실이 맑고 높아서 벼슬에 나아가기를
좋아하지 않고 자연 속에 묻혀 덕을 기르기 위해 아산땅
죽동(竹東-대동, 현재의 음봉면 송촌리, 동암1·2리)에
은거했다. 태종 때에 가정대부 춘추관사 좌참찬으로 증직
되었으며 묘는 음봉면 대동(동암1리) 김해 김씨 종산에 있
<김합의 묘>
다. 1985년에 묘역을 정비하고 세운 묘비가 있다.
[21] 남발
南撥
<1561(명종 16년) ~ 1646(인조 24년)>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개국일등공신 영의정 재(在)의 8세손이며 의령(宜寧) 남(南)씨 온양(송악면) 입향
조다. 사평(司評)을 지낸 설애(雪崖) 언진(彦縝)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서성군(西城君) 숭조(崇祖)의 딸(전
주 이씨)이다. 자는 공제(公濟)이고 호는 화은(華隱)이다. 부인이 예안 이씨 온양 입향조인 이사종(李嗣宗)
의 아들 정악원정 단( )의 딸이었기 때문에 이를 인연으로 송악 지역에 자리 잡게 되었으며 실제로는 주
로 서울에 거주하였다. 우계 성혼(成渾)의 문인으로 1588년(선조 21)에 생원과에 합격하고 의금부도사·
종묘서직장·사헌부감찰·보은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1610년(광해군 2)에 문과에 급제한 뒤 공조좌랑에
제수되었고 춘방(春坊-세자시강원)·양사(兩司-사헌부·사간원)를 거쳐 통정대부 우승지(右承旨-정3
품)에 이르렀다. 1612년(광해군 4)에 서장관으로, 1619년(광해군 11년)에는 성절사(聖節使)로 두 차례나
연경에 다녀오기도 했다. 1623년에 인조반정이 일어나 관작을 삭탈당하고 유배되었으나 얼마 뒤에 풀려
났고 다시 종묘서령·군자감정·통례원정·상의원정 등으로 부름을 받았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일찍
이 온양 설애산(설화산) 아래(송악 역촌리)에 집을 짓고 살았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 계속 거주하다가 86
세에 졸하였고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진사로서 봉사(奉事)을 역임하고 병조참판에 추증된 아들 엽(煌-또
는“황”
)과 손자 두성(斗星)·유성(有星)·필성(弼星)·몽성(夢星)·오성(五星)을 두었다. 손자 5형제 중
유성·필성·몽성 3형제가 문과, 오성이 무과에 급제하였다. 묘는 태안 삭선리 금굴산 문중 묘지에 있으
며 증손 구만(九萬)이 찬한 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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