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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남점은 11살 때부터 어청도에서 식모살이 시작하였다.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월급
은 없었고 아이를 보아주고 밥을 얻어먹는 정도의 조건이었다. 부잣집은 아닌데 배를 하
느라고 아이 돌보는 사람이 필요해서 둔 것이었다. 월급은 없었지만 옷도 해 주고 배고
프지 않아 집보다 편하게 있었다. 그 다음은 광천에 가서 1년 반 정도 살았다. 이 집은
노부부가 석유를 파는 집인데 밥을 해주고 2,000원을 월급으로 받았다. 광천에서는 노
부부가 돌아가신 후, 천안의 술과 음료수를 도매하는 집에서 1년 반 정도 지냈다. 그 뒤
논산으로 친구와 함께 식모 살러 갔다. 이 집은 친구의 숙모 집인데 식모를 둘 형편이 아
닌데도 아이들 키우기가 어려워 객식구를 두려고 한 것이었다. 남편은 군인 가고 아이들
은 다섯이나 되는데 보따리장사를 하였으니 아이를 키울 여력이 없어 그리했다. 이 집은
식모는두었어도끼니꺼리가없을정도여서1년도못되어친구와같이집으로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올 때가 18살이었고, 그녀는 이듬해에 33세의 녹도 총각과 결혼하였다. 그
때가나이19세였다.
복남점이시집을오니까시집에는시아버지,시어머니,시동생둘,시누이셋,신랑까지
아홉 식구였다. 남편은 목포로 배를 타러 나가면 보름이나 1달 만에 들어왔고, 시아버지
와 시어머니는 너무 엄격하여 늘 불안하게 지냈다. 그녀는 6남매를 낳아 길렀는데 아이
들을 기르면서도 시집살이가 하도 심하여 ‘울애기’ 소리를 한 번도 안하고 아이를 덥석
안아보지도못했다.첫딸을낳고나서내리사내애넷을낳고도막내로딸을낳았다고구
박받을 정도였다. 남편 사랑이나 기쁨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았다. 남편이 한 달 만에 들
어와도 잠자리조차 마음대로 못할 정도였다. 아이들 돌잔치도 시부모가 싫어하여 할 수
없었다.아들은중학교까지보냈으나딸들은녹도에서초등학교만보냈다.
김향화(金香花)는 1932년 호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김학도는 어업조합에서 일을 보
았고 3남 3녀를 낳았는데 막내딸 김향화를 훌륭하게 자라라고, 일본인 재등오길(齋藤五
吉, 사이또고기치)의 양녀로 보냈다. 그녀는 서울에서 소학교 4학년 2학기를 다니다가 해
방이 되어 부모가 있는 호도로 들어왔고, 이후 학교는 다니지 못했다. 호도에서 청소년
기를보내고어업조합에다니는녹도의남편과혼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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