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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결집-거주하는 양상이 있었다. 이러한 양상은 명망 있는 향리 가문들이 세거하는 곳일수
수가 사령들에게 호장을 당장 하옥시키라고 명령하여 사령들이 그를 붙잡으러 갔다고 한
록 두드러졌다. 즉 조선 후기 부계 중심의 친족 운영 원리가 향리들의 거주 방식에도 작용하
다. 이때 호장이 사령들에게 “군수는 임기를 마치고 가면 그만인데, 나한테 재갈을 물리겠느
여 읍내에도 동성 촌락 등이 발전하였다. 그러나 하급 관속들 중에는 해당 지역에 이렇다 할
냐.”고 호통을 치니 감히 포박할 수 없었다고 한다.
기반이나 연고 없이 하리임(下吏任) 즉 가리(假吏) 등 하급 관속들은 단기간 읍치에 거주하
이 이야기는 당시 토착 아전들의 실태를 반영하고 있다. 당시 대흥군수는 이창세 부임 이
였고, 읍치에는 가리들 외에 읍치 내부나 또는 그 주변에 관노나 사령, 포졸 등 각종 형태의
후로 그 재임기간이 2년을 채 넘기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군수가 자주 체임되는 상황에서
하급 관속들도 거주하였다.
토착 아전들의 세력과 부당 착취는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렇듯 읍치에 거주하는 관속들의 거주 기간 및 이동의 빈도는 지위의 안정성과 긴밀한
3)대흥의유회군과동학농민군
상관관계가 있다. 즉 향리 가문들은 현저한 이임(吏任) 세습과 장기간의 세거 양상을 보이
고, 이와는 달리 가리 등 하급 관속들은 그들의 불안정한 지위를 반영하듯 단기간 읍치에 거
주함은 물론 새로운 구성원들로 끊임없이 교체되었다.
대흥은 동학농민전쟁과 깊은 인연이 있는 곳이다. 고부민란의 불씨를 제공한 조병갑이 고
대흥군의 읍치에도 대흥에 세거한 주도 가계가 있었는데, 동서리의 전주이씨(14대 420년),
부에서 쫓겨 와서 은신했던 곳이고, 그의 어머니 묘소가 있고 그의 자손들이 거주하였던 곳이
상중리의 진주강씨(12대 360년), 상중리 파평윤씨(12대 330년) 그리고 동서리 김해김씨(13
기도 하다. 그리고 동학농민군에 대항하기 위한 유회군이 호서 지역 최초로 창설된 곳이다.
대 260년) 등이다. 그 가운데 상중리의 진주강씨는 강영근(족보상 덕장(德章), 1603~1693)이
그동안 학계에는 대흥 유회군에 관하여 유회군을 조직하여 홍주성 싸움에 참가하였다는
1623년 읍내면 상리에 이거하여 한참사(韓參事, 함열한씨)의 사위가 되면서 정착하였다고
정도로만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임성동고록(任城同苦錄)』과 『공사실기』를 통하여 대흥
한다. 진주강씨 족보와 에 의하면 강영근의 6세손 재황(1799~1871)
유회군의 전모를 알 수 있었다.
은 병조(兵曹) 순장(巡將)을 지내다가 만년에 이역(吏役)에 취임하였다. 재황의 조부(祖父)
『임성동고록』은 「대흥유회소서(大興儒會所序)」, 「유회좌목(儒會座目)」, 「임성경란기
유량(有良, 1769~1841)과 부(父) 계직(啓稷, 1748~1821)은 용양위 호군(龍?衛護軍)이었
(任城經亂記)」로 구성되어 있다. 「대흥유회소서」는 유회소를 창설하게 된 과정, 의의에 대
고, 외조(外祖) 곽주원은 적상산성(赤裳山城) 별장(別將), 처가는 증조, 조, 외조, 부까지 모
하여 신명선(申命善)이 기술한 것이고, 「유회좌목」은 유회군에 참여한 전직 관리, 유학 등
두 호장(戶長)을 지냈다. 재황의 손자 만영(萬永, 족보상 基萬, 1861~1910) 역시 호장을 지
대흥 사족, 향리층, 포군, 사령, 관노의 명단으로 그들의 거주지까지 명시되어 있다. 「임성경
냈고 별호가 사흥(넉넉이)이었다고 마을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다.
란기」는 1895년에 안희중(安熙中)이 기록한 것으로 1894년 동학농민군과의 투쟁 과정을
『임성동고록』에 의하면 향리들의 거주지는 주로 읍내면 동북리, 서북리, 상리, 중리이다.
날짜별로 서술한 것이다. 「임란경란기」에 의하면 대흥군수 이창세는 1894년에 청국군의 아
포군 51명은 주로 거변면(18명), 일남면(7명), 내북면(7명), 근동(6명), 원동면(5명)에 거주하
산 주둔에 따른 경비 조달을 위해 군사 모집과 우마 공급이라는 상부의 명령을 중단시키고
여 거변면에 제일 많이 거주하였으며 비교적 고른 분포를 보인다.
직산 전투의 청군 패잔병들을 배불리 먹여 노략질을 예방하고 백성들의 불만을 없애서 안도
이렇듯 조선시대 동서 · 상중리는 관청에서 구실살이 하는 아전들과 관노들의 거주 공간
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런데 1894년 7월 11일에 대흥군 공당(公堂)에 침입한 동학교도를 이
이었고, 그로 인해 이와 관련된 설화와 속담이 현재까지도 전승되고 있다.
창세 군수가 상투만 자르고 훈방하였지만 읍촌 사람들이 그를 밟아 죽이는 사건이 발생하였
현재 마을에는 구한말의 호장 강기만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 이야기는 삼정문
다. 예산 지역 동학 농민군들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동학에 반대하고 비협조적인 양반집을
란 가운데 가장 문란하였다는 환곡과 관련되어 있다. 당시 질청, 장청, 책방 아전들이 환곡
집중적으로 약탈하였다. 이에 대흥 관내의 유림 세력들은 동학농민군에 대항하기 위하여 향
을 많이 축내었는데, 군수가 부임하여 환곡을 살피니 많은 양이 부족하였다고 한다. 이에 군
교에서 모여 각각 면정을 임명하고 절목을 정하여 ‘대흥유회소’를 창설하였다.
4.공동체사회와민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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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의뿌리예산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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