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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주고, 잡은 고기를 받아서 팔았다. 그래서 이득은 전주들이 보고, 섬사람들은 많은
돈을 벌지 못하였다. 그때 뒷돈 대준 전주는 대천 녹문에 사는 정참봉, 영보리 가숭구지
에 살던 이참봉, 대천 궁촌 사는 오주사, 결성 사는 맹승전, 신대리 벌말 사는 박참봉 등
이었다. 이들은 녹도에 살다가 돈을 벌어 육지로 이주하였고 많은 부를 축적하여 후손
들을일본에유학보내기도하였다.
그는 22살에 같은 섬마을에 사는 21살의 정씨댁 처녀와 결혼하였다. 슬하에 6남 2녀,
8남매를키웠다.낳아서잃은자식이하나도없이모두잘키웠다.위로아들3명을두었
는데 큰아들은 현재 71세, 둘째 아들은 69세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집안 형편이
어려웠고, 더구나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8년 동안 9번의 집안 장례를 치르면서 매우 어
려운 상황이었다. 더구나 식구는 많아서 12명에 이르기도 했다. 그래서 남의 홍어배를
타고, 농사를 지으면서 아이들을 키웠기 때문에 아이들은 녹도에서 초등학교만 졸업시
키고 도시로 내보냈다. 딸들은 아들 삼형제 아래로 낳았는데 모두 녹도에서 초등학교만
졸업시켰다. 다섯째와 여섯째 아들은 녹도에서 초등학교를 보내고, 대천이나 서울에서
고등학교까지 졸업시켜 내보냈다. 현재 부인은 2년 전에 죽고 큰딸이 녹도에 들어와 그
를돌보고있으며,넷째와다섯째아들이녹도의마을일을하고있다.
그는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초분으로 들였다가 장례를 모셨다. 초분은 육지의 초상처
럼 사망한 지 3일쯤에 모셨다. 장소는 대개 바닷가의 모래장벌의 육지쪽 끝이었다. 이곳
은모래로되어있기는하지만사리때에도바닷물이들어오지않는곳이었다.
여객선이 없던 시절, 녹도에는 장배가 있었다. 어선과 같은 풍선배인데 사람은 20명까
지 탈 수 있었고, 마을 사람들을 실어 날랐다. 배삯을 받았고, 대천장 안날에는 정기적
으로 운항하였고, 손님이 있으면 이틀에 한 번도 운항하였다. 배를 이용한 사람들은 주
로 녹도 주민들로 일반 용무로 나가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녹도에서 잡은 생선이나 김 등
해조류 각종 젓갈을 팔러 나가는 사람이 많았다. 녹도에서 팔러 나오는 젓갈은 갈치젓
갈,꼴둑젓갈,박대젓갈등이었다.
배는쇗개에대었는데바람이좋으면2시간에올수도있었으나바람이없으면5~6시
184 보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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