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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번이나한사람이었다.
아버지 이유신은 홍성보통하교를 졸업하고 여수 수산학교를 졸업한 당시의 지식인이
었는데 수산업을 하려고 그가 8살 무렵 가족을 데리고 녹도로 들어와 생활하였다. 그래
서홍성군에서태어났지만아버지를따라녹도에들어와이제까지생활하고있다.
1932년 녹도로 이주했는데 녹도에는 학교가 없고 서당만 있어 서당에 다녔다. 약 20
명이 함께 다녔다. 당시 서당의 선생님은 오천면 오포리 가그말 출신 조용기였다. 그는
학식이 높았고 수운교를 믿는 사람이었다. 조용기 밑에서 한문을 5년 동안 배웠는데, 선
생은 한문뿐만 아니라 신학문과 일본말까지도 가르쳤다. 한번은 일본 순사들이 서당에
들어왔는데,한문책을집어넣고일본말책을꺼내놓고배우는시늉을하기도하였다.그
는 11살 때 배운 소학의 서문을 지금도 줄줄 외울 정도이다. 서당에 5년 다닌 후 신식학
교에는다니지않았다.
일제강점기 녹도 주벅에서 고기, 특히 조기를 잡아 서해어업의 중심지가 되고, 파시가
형성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큰돈을 벌게 되자 아편을 맞는 사람이 많았다. 이규인의 아
버지도 아편을 맞았다. 12살 때 이런 사실을 알고, 아편을 끊지 않으면 자살한다고 소동
을벌인적도있었다.아버지는아들을살리려고아편을끊었다.
아버지가 계실 때에는 일을 하지 않다가 1946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는 일을 시
작하였다. 우선 밭농사 580평을 지었는데 녹도는 경사가 급하고 소가 없어 모두 따비로
파서 농사를 지었다. 580평을 따비로 파는데는 보리를 갈 때는 5일, 글을 갈 때는 3일
걸렸다. 글을 갈 때는 비가 오는 계절이라 땅이 물렀기 때문이다. 밭에는 보리를 주로 심
고,글로는스슥(조),고추,김장채소등을심었다.보리나스슥은방아를찧어야먹을수
있었는데, 방앗간이 없어 모두 집에서 절구통에 찧어 먹었다. 나무 절구통에 찧었는데
여자들은 절구로 남자들은 메겡이로 찧었다. 여자만 찧지 않고 남자도 찧었다. 쌀은 육
지에서사다가먹었다.어업도했기때문에쌀을사다가먹을수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일제강점기에 어청도에서 250원을 주고 홍어배를 사서 홍어를 잡았
다. 당시 배는 풍선배로 길이가 40~50자였고 돛은 3개였다. 바람만 좋으면 빨리 움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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