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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이 사라진다는 것은 전통적인 한국 문화의 뿌리가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이 여러 차례의 정치적 변동과 관련하여 입향한 경우가 많았다. 중기에는 임진왜란과 병자
대한 아쉬움과 함께 전통 문화 보존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또한 아프리
호란이라는 큰 전란으로 차령산지의 협곡과 가야산, 봉수산 산록 등 은거에 유리한 위치에
카 속담에 “노인 한 분이 돌아가시면 도서관 하나가 사라진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처럼 한
정착하였거나 친지나 묘지를 따라 입향하였다. 이렇게 낙향, 정착한 사족들은 분가로 지역
개인이 평생에 걸쳐 경험하고 축적한 다양한 정보와 지혜가 존재한다. 특히 전통과 근대, 현
내 이주를 하기도 하였다.
대, 그리고 식민지 · 미군정 · 전쟁 · 산업화기를 축약적 · 집약적으로 살아온 마을 노년층은
대흥의 대표적인 사족은 사마시 합격자, 대흥향교 청금록 입록자, 1894년 유회소 참여자
1970년대까지 도시에 비해 전통 가치와 문화가 온존해 있던 마을에서 유년기와 중장년 시
명단 등에 의하면 울산박씨, 밀양박씨, 파평윤씨, 전주이씨, 창령성씨, 반남박씨 그리고 해
절을 보냈던 마을의 주체들이다.
평윤씨 등이다.
즉 마을에는 전통과 현재가 공존하고 있다. 지금까지 전통 시대 마을 공동체에서 생산된
사족들의 거주지는 『임성동고록』에 따르면 주로 일남면(14명), 원동면(10명), 거변면(13
다양한 문헌 자료와 마을의 주체들의 기억을 바탕으로 마을의 역사성과 공동체적 삶의 중요
명)이다. 다시 말하면 대흥군 내에서 사족 가문이 주로 거주하였던 곳은 신양(원동면+거변
성에 주목하여 마을 공동체의 생애를 재구성해 보고 정체성을 찾아보고자 하는 시도를 해 왔
면), 광시(일남면+이남면), 응봉(내북면+외북면)이었다. 반면에 읍치 지역에는 사족들이 거
다. 여기에서도 예산의 마을을 대상으로 ‘향촌 공동체의 과거와 현재’를 추적해 보고자 한다.
의 거주하지 않았고, 거주하였던 가문 중에 현달한 가문이 없었다.
대상 마을은 조선시대 읍치 마을로 예산군 대흥면 동서 · 상중리이다. 동서 · 상중리 마을
이러한 사족들의 거주 양상이 조선 말기부터 변화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즉 세도가들은
공동체의 과거와 현재는 마을에 남아 있는 읍치 경관과 문헌 자료, 그리고 마을 사람들의 기
읍치 지역으로 이주하여 특권과 경작지를 점유하고 일제강점기에 유지집단으로 변신하였
억을 토대로 재구성한 것이다. 특히 일제강점기 이후 근현대기는 마을 사람들의 구술에 전
다. 읍치로 이주한 세도가들은 실제로 정착하지 않고 토지나 선산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거
적으로 의지하였지만, 여러 마을 사람들의 기억과 구전을 크로스체크하고, 문헌 자료와 사진
주하거나 일가나 마름을 통하여 지역민을 지배하기도 하였다. 반면에 읍치 지역으로 실제
자료를 접목시켜 서술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용이 제한적이고 오류의 가능성이 있다.
거주지를 옮겨 토지를 점유하고 상업을 통하여 부를 축적하고 지역민을 지배한 사례(교촌리
판서 정원용 , 동서리의 윤돈구 · 대흥 유회면장 정제익)도 있다.
2.조선시대읍치의구성과신분별거주지
2)대흥군읍치의구성과거주민
1)대흥사족의존재와거주지
조선시대 읍치는 부 · 목 · 군 · 현의 청사소재지(廳舍所在地)로서 읍취락(邑聚落) 혹은
읍내(邑內)라고도 한다. 읍치는 그 규모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정보의 집결지였고 대부분 5
조선시대 대흥군은 아산만에서 무한천을 따라 내륙으로 유입하는 것이 비교적 용이한 지
일마다 장시가 열리는 상업적 거래지였으며 그 주민의 상당수가 비농업적 또는 반농업적 직
리적 조건을 갖추었고, 봉수산 등 산수가 수려한 지역을 끼고 있을 뿐 아니라 차령산지에 발
업인들이었다. 읍치는 도로나 하천의 접합(接合) 지점에 위치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개의 경
달한 협곡을 따라 은거에 유리한 지형이 많아 사족층이 거주지로 선택할 수 있는 유리한 조
우 읍내에서 이웃 읍내까지의 거리가 60리~100리, 평균 80리 정도 상거(相距)하는 것이 보
건들을 갖추고 있었다.
통이었고, 읍내에서 그 영역 내의 모든 중심 취락은 일일왕복권 내에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으로 인하여 대흥에 세거해 온 사족들은 대체로 조선 초기에는 불사
그리고 읍치의 입지 필수 조건은 편리한 교통, 방어에 유리한 지형, 넓은 경작지, 원활한 물
이군의 절의를 지켜 낙향하였고, 전기 중반 이후에는 중앙 관료로 한양에 진출했던 관료들
의 공급이라고 한다.
4.공동체사회와민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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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의뿌리예산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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