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禮山의
하였다.
1938년天來가입원하였을때매일병원으로출근하여정성을다해병간호를하였으며,이해에
일본에서도그의뛰어난실력을인정하여석봉은일본기원(日本紀元)2600년기념보인(寶印)‘강
원신궁(?原神宮)’의주문(朱文)과백문(白文)을제작하였다.
석봉은1944년39살에일본에서의모든공직을사임하고귀국하였으며,이후에는예산여자중고
등학교교사,전주금산사에서수도생활을하였다.
1961년일본북해도에서숙식을함께하며3년간지낸일본인서화원동인手島右卿의초청으로
도일하여4개월간동경에거주하였는데,이때전각주문이쇄도하여주야로몰두했다.
1965년60살에는서울국립중앙공보관에서제1회개인전을개최하였으며1966년에도手島右卿
의초청으로1년4개월간동경에머물면서전각작품을제작하였다.
1968년서울종로에사무실을개설하고국립중앙공보관에서제2회개인전을개최하였다.1977년
에는일본시사신문사(時事新聞社에)서제정한문화상을수상하였다.
1982년제1회국립현대미술관초대전에출품하였으며,이초대전이후몇차례더출품하였다.
같은해에일본동경경왕백화점에서개인전을개최하고,일본제자들에의해‘고석봉작품집1’이
발간되었다.1983년과1985년에는대한민국미술대전심사위원을역임하였으며1983년에는추사
고택의추모비를썼다.
1988년83살에일본에서고석봉서예·전각전을개최하였으며1989년에는제1회대한민국서예대
전(서협주최)심사를하였고이후에는몇년전부터안좋은건강이더악화되어작품활동을못하
게되었다.그러나이후에도印縞나다새기지못한유품이지금도온양자택에남아있어그의예
술에대한열정을보여주고있다.1990년85세에일본제자들에의해2번째고석봉작품집이간행
되었다.
1993년8월10일새벽2시온양자택에서영면하였다.슬하에1남3녀를두었으며묘는대흥면하
탄방리에있다.
그에대한일화로1965년한·일국교회담이있었던해당시중앙정보부장인김종필씨는회담에참
석한일본인관료로부터석봉고봉주라는이름을처음듣게된다.일본인관료들은석봉의예술세
계를극찬하며그의안부를물었지만당시한국대표들가운데그의존재를아는사람이없었다.회
담이끝난뒤김종필씨는석봉이누구인지긴급히알아보라는지시를한일이있었다.그만큼석봉
은당시일본에서극찬을받는예술인이었다.
근대의추사와오창석(吳昌碩)등의여러명가(名家)에이르기까지섭렵한석봉은섬려하면서도
고아한인풍(印風)을창출하여일본전각계에서큰평가를받고있으며지금도일본의한인풍을
형성하고있다.그러한그의서예·전각예술은한국서예사에도길이남을만한위대한업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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