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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에 왕이 온양온천에 행차할 때 어가행렬의 선두에서 가던
용기(龍旗)가 돌풍에 쓰러지려고 하자 뛰쳐나가 깃대를 잡고 무
사히 행차가 이어질 수 있게 했다. 이로 인해 그는 왕으로부터
‘작대(作臺)’
라는 별호를 받아 사람들이 그를‘작대공(作臺公)’
이라 했고 그의 묘가 있는 산을‘작대산’
이라 했다는 일화가 전
한다. 그가 졸하자 나라에서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고 병
조판서를 추증했다. 묘는 음봉면 대동(동암1리) 김해김씨 선영
에 있다.
<김윤의 묘>
[19] 김질
金秩
<1364(고려 공민왕 13년) ~ 1454(단종2년)>
고려 말의 문신이다. 본관은 김녕(金寧-금녕)으로 김녕 김씨 아산 도고 지역 입향조이다. 금녕군(金寧
君-김녕군) 시흥(始興)의 후손이고 분성군(盆城君) 정갑(挺甲)의 아들이다. 자는 국상(國祥), 호는 송암(松
菴)으로 문중에서는 송암공으로 칭한다. 부인은 밀양 박씨이다. 고려 말에 광정대부 태자소부 소감(少監-
4품)을 역임했으며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신창 도고산 아래 도고면 도산리 어랑촌에 들어와 은
둔했다. 태조 이성계가 과거의 정의를 생각해서 원종공신으로 책록하고 예조판서의 벼슬을 주며 여러 차
례 불렀으나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 하여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스스로 송암이라 호를 짓고 도고산 아래
에 숨어 살면서 충절을 온전히 지키며 솔향을 벗삼아 일생을 마쳤다. 그의 아들 중추원부사 익생(益生)은
그를 극진히 모셔서 효자 정려를 받았다. 그가 죽자 태조가 윤음(綸音)으로 도고산 일대를 사패하고 예장
을 명했다. 묘는 도고면 도산리 유좌에 있고 묘갈(墓碣)과 1974년에 세운 묘비가 있다.
<김질의 묘>
<김녕 김씨 세거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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