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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암김선생적려유허추모비! 自菴金先生謫廬遺墟追慕碑
유명조선국 증 가선대부 이조참판 행 통정대부 홍문관 부제학 자암김선생적려유허추모비
아! 이곳은 나의 선조이신 자암 선생께서 귀양살이 하시던 고을이다. 선생의 6대손인 내가 이 고을에
수령으로 와서 처음으로 선생의 유지를 찾았다. 고을 사람이 그 곳을 알려주어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선생의 음덕이 이곳 사람들 마음속 깊이 스며 있음을 알았으며, 이미 그 여기 저기 돌아보며 사모함과
존경스러움과 슬픔을 금치 못하였다. 또한 스스로 생각하기를,‘현인 군자들이 지나거나 머물러 사시
던 곳이라면 그러한 사실들을 밝게 드러내어 영원히 잊지 않게 하는 법이거늘, 불초 자손이 여기에 와
서 어찌 선생의 유적을 돌보지 않아 그 자취가 길이 전하지 않도록 하겠는가.’고 여겼다.
그러므로 임피의 적소나 예산 고향땅에 모두 선생의 서원이 있으니, 이곳에도 반드시 비석에 새겨 전
하고자 하는 바이다. 선생의 휘는 구요, 자는 대유이니, 본관은 광주이다. 타고 나면서 특이한 자질이
있어 6세 때에 석류에 관한 시를 지었는데, 그 뜻이 기이하여 모든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그리
고 16세에는 한성시에서 장원을 하였다. 약관인 20세에는 생원시와 진사시에서 모두 급제하니, 시험
관이 선생의 지은 시에 쓰기를,‘한퇴지(한유)의 작법이요, 왕희지(의 필체이다’라고 하고는 놀라워하
였다. 26세 때에 처음으로 벼슬길에 오르니 괴원(槐院 승무원)을 거쳐 홍문관의 정자, 저작박사가 되었
다. 그리고 수찬, 교리를 역임하고 이조의 좌랑과 정랑을 거쳐 사간원 사간이 되었다. 그리고 또 다시
홍문관에 들어가 응교, 전한, 직제학을 지냈다. 사가호당(조선조 때 인재를 기르고 문풍을 떨칠 목적으
로 양반 관료, 지식인 가운데 총명하고 젊은 문신들을 뽑아 여가를 주고 국비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하던 제도) 하였으며, 이어 동부승지로 승직되었다가 부제학으로 옮겨 임명되었다. 일찍이 달 밝은 밤
옥당에서 숙직을 하며 독서를 하고 있었는데, 중종 임금께서 달빛을 따라 술을 가지고 친림하셨다. 임
금께서는 선생의 책 읽는 청아한 소리에 이끌려 시가를 읊게 하신 다음 선생에게 담비 가죽을 내려 융
숭히 대우하셨으니, 이 일은 실로 고금에 드문 일이다. 선생께서는 일찍이 조정암, 김충암과 함께 도의
로써 사귀었다. 서로 협심하고 도와서 요순시절과 같은 새 세상을 실현하고자 하였으나 시운이 불행하
여 기묘사화가 일어나 이 땅에 귀양 오시게 되었다. 일의 자세한 내용을 알지 못한 사람들은 두려워하
고 겁내었으나 정작 선생은 화복을 개의치 않았고 대나무 숲에 작은 집을 지어 놓고 술을 즐기며 한가
로이 지내셨다. 13년 만에 다시 임피 로 귀양지를 옮겼다가, 계사년(중종 28, 1533년)에 풀려났고, 이
듬해 갑오년에 복관되었다. 유배 중에 연이어 부모상을 당하였으므로 슬픔이 지나쳐 마침내 송추(松
楸)에 돌아와 추복(追服)하고 시묘살이를 하면서 조석으로 통곡하니, 눈물이 초목을 적셔 다 말라 죽였
다. 선생은 홍치 무인년(성종 19, 1488년)에 태어나시고, 가정 갑오년(성종 29, 1534년)에 세상을 떠
나셨으니, 그 때의 나이는 47세였다. 만력 신묘년(선조 27년, 1591년)에 이조 참판으로 추증되었으니,
종계변무 때의 공로 때문이었다. 아! 선생의 도덕과 문장은 그의 행장에 쓰여 있고, 또한 국사에 등재
되어 있기 때문에 가히 속일 것이 없으므로 불초 후손이 짧은 소견을 보탤 것이 없겠다. 이제 기묘사화
가 일어난 지 188년 만에 이곳에다 비석을 세우게 되니, 이 어찌 우러러 사모함이 나 혼자만의 사사로
운 정이겠는가. 장차 멀고 외딴 시골 사람들도 추모하고 분발하여 선생의 유적이 이 곳에 있음을 잊지
않게 하노라. 숭정 기원 후 79년(숙종 32,1706년) 병술년 3월 에 6대손 통훈대부 행 남해현령 만상은
쓰고, 후안(後安)통훈대부 전 행 사헌부 장령 김만주는 삼가 전액(篆額)하다.
김구가 유배지인 남해 땅을 떠난 지 173년 후인 1704년(숙종 30)에 육대 후손 김만상이 남해현령으로
와서 조상의 흔적을 찾아보니 찾을 길이 없고, 향인에게 수소문하여 옛 터를 찾아 1706년(숙종 32)에
자암김선생적려유허추모비를 세우고 김구가 향인과 교유했던 서당 터에 죽림서원을 세워 자암 김구의 얼
을 길이 새길 수 있도록 배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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