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禮山의
이응노(李應魯)(1904~1989)
고암 이응노 선생의 생전 모습과 고암의 작품들. 사진 오른쪽은 수덕여관 인근에 있는 고암의 암각화.
이근상(李根商)의 넷째 아들로 출생, 본관(本貫)은 전의(全義)이다. 예술가로서의 소질을
일찍자각(自覺)한그는16세에당진군순성면에서염제(念齋)송태회(宋泰會)선생으로부
터묵화(墨畵)의기본을사사(師事)하고20세에무작정상경한그는해강(海岡)김규진(金
圭鎭)으로부터가르침을받은지넉달만인1924년(21세때)에제3회조선미술전사군자부
?청죽(靑竹)?으로출품하여입선하므로써화가로서의입문을하게된다.
1931년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 특선으로 이왕직상(李王職賞)을 수상하고 오직 그림공
부만을위해서1934년동경으로갔다.일본화원전에서도여러차례의입?특선의영광을차지
하던중1945년일본이패망하자그는귀국하여예산의수덕사입구의여관(현수덕여관)을
인수하여조용히그림이나그리면서은둔(隱遁)하려던그는돌연(突然)상경(上京)하여재
편(再編)되는 미술계에서 일익(一翼)을 담당하게 되어 조선미술협회의 상임위원과 단구미
술원 초대작가로 위촉받고 1948년 홍익대학교 미술학부 창설과 동시에 주임교수로 임명되
고그후고암화숙(顧菴畵塾)을경영하여큰성공을거두었다.
1958년국제미술평론가협회프랑스지부장초청과독일프랑크푸르트개인전추천에의해서
그는부인박인경과함께파리에정착하게된다.
1967년동백림사건(東伯林事件)이라는정보사범(情報事犯)사건으로연루(連累)되어유죄
판결을 받게 되는데 6.25당시 행방불명된 아들과 상봉할 목적으로 동베르린에 갔다가 뜻도
못이룬채?스파이?가되어옥중생활을하게된다.그러나프랑스정부와해외의민간단체의
거센항의에힘입어1969년3월에2년6개월간의옥중생활(獄中生活)을마감하고수덕여관
을경영하던부인박귀희여사의곁에서요양하고있는동안암각화(岩刻畵)를제작함으로
써손꼽히는문화재를남기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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