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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고 한다.
절의가 높았던 동시에 효성으로도 하늘을 감동시킨 효자였다 어버이 섬김에 어긋남이 없었고
지극한 정성으로 봉양하였으며 양친의 전후 상사에 몸소 흙은 져다가 무덤을 이루고 죽을 마
시며 여막에 시묘하였다 무덤앞에 엎드려 피눈물 흘리며 울었고 계단의 풀이 자라지 못할 정
도로 묘소에 왕래하였다 하얀 까마귀가 무덤가 여막에 둥지를 짓고 살았는데 사람들이 말하
기를 효성에 감동한 까닭이라고 칭송했다.
고려 공양왕 때에 효자 정려를 명하였으며
삼강행실록 에 이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배방
면 금곡리에 정려가 있다.
묘는 온양시 법곡동 건좌에 있으며 영조 경오년
(1759 )
년 에 예관을 보내어 치제했다
박건양(
진규
의 아들인데 진사로서 참봉을 거쳐 현감에 이르렀다 백성을 아끼고 정사를 간소
하게 하였으며 장수하여 첨지 중추부사에 승차했다
박관덕(
觀德
자는 가회
요 호는 서원
이며 본관은 함양이니 사마
의화
의 아들이
다 시와 부에 뛰어나서 여러차례 향시에 합격했으나 벼슬에 오르지 못하고 포의로 마치니
사우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 유고가 남아 있다
박 권
자는 이경
이요 호는 고광
孤洸
이며 본관은 함양이니 오한
성건
의 아들
이다 문과 급제하여 정언이 되었으며 연산군에게 상소를 올려 충간하다가 길주로 유배되었
고 다시 해남으로 옮겼다가 석방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중종때에 대사간의 벼슬을 내려 불
렀으나 이미 세상을 떠나 뒤였다 기묘 명현록에 기록되어 있으며 농암 김창협이 행장을 지
었고 축정서원에 배향되었다
박기조(
자는 기지
요 호는 수남
이며 본관은 함양이니 유일
지양
의 자손이
다 진사가 되어 의홍 임천 평산의 수령을 역임하고 한성 서윤을 지냈다 인현황후가 궁중에
서 사제로 물러나왔을 때에 과거 급제가로서 홀로 나아가 절하고 적막한 환경에서 군신과 모
자의 의미를 다했다 영조때의 영의정 김재로가 아뢰기를
박기조가 홀로 서궁에 배알하여 그 의리가 송갑조와 다름이 없으니 마땅히 포상해야 할
것입니다 라고 하여 특별히 이조참판을 추증하였다.
박뇌공(
雷公
광대로서 그 아내와 더불어 함께 효자 효부 정려를 명했으며 그 딸의 신역을 면제해 주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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