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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워해서 그 직분을 다할 수 없으니 어찌 실록을 장래에 믿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세종이 그의 말에 따라 태종실록을 읽지 않았다
집안 살림을 다스리지 않아 거처하는 집이 비바람을 막지 못했고 출입할 때에는 소를 타고
다녔기 때문에 보는 사람들이 재상인 줄을 알지 못했다 세종을 도와 천지를 화육하고 모든
업적이 빛나서 요순과 같은 태평시대의 치적을 이루었다 청백리에 선발되고 효행으로 정려
를 내렸으며 별세했을 때에는 세종게서 조정 백관을 거느리고 통곡했다고 하였다 시호를 문
정이라 했다.
명신으로 유명한 동시에 효자로서 더욱 존경을 받았다
. 10
세에 모친상을 당하여 물과 장을
입에 대지 않았으며
년동안 무덤아래에 여막을 짓고 시묘하였다 이때에 하얀 까마귀가 연막
에 둥지를 짓고 함께 살았다고 하며 묘소에 오르내기를 자주하여 계단의 풀이 나지 않았다
부친상을 당해서도 한결같이 하였는데 무덤앞에 있던 큰 잣나무가 산돼지에게 부딪쳐 죽어버
렸다 이것을 보고
3
사람들은 그의 효성에 감동하여 전고에 듣지 못한 일이라고 칭찬했다
태종때에 효자 정문을 세우도록 명하여 생존시에 생정려를 배방면 금곡리에 세웠다
맹세형(
자는 여평
이요 호는 하곡
이며 본관은 신창이니 명신
사성
의 후손
으로 사계
의 문인이다 인조때에 문과 급제하여 안동부사가 되었으며 병자호란
(1636 )
이 일어나던 해에 선산에 수령으로 있었는데 오랑캐 침입의 소식을 듣고 군사를 모아 남한산
성을 달려가고자 했으나 경상감사의 명령으로 중지했다
병자호란이 끝난 후에 입근 수용 척화등
10
여가지 사항을 추장해야 한다는 상소문을 올렸
으며 봉사 책이 있다 이조참판 제학을 추증했다
1
맹 유
본관은 신창이요 전서
의 아들이다 고려 공민왕때에 문과 급제하여 이부상서
가 되었다 고려가 망하자 태학생 조의생 임선미 등과 함께 서두문동으로 들어가
충절을 지켰다.
조선 영조 신미년
(1751 )
년 에 표충사를 세우고 삼절신과 아울러 매향했다
맹회도(
호는 동포
요 본관은 신창이니 상서
의 아들이다 공양왕 때에 문과 급제
하여 한림어사 수문전 제학을 지냈다 정몽주 길재와 같은 충신들과 도의로써 교제하였으며
고려가 망하자 세상일을 사절하고 온양 설화산 아래 금곡촌으로 퇴거하여 산수를 즐기며 나
오지 않았다 태종이 여러 차례 불렀으나 굽히지 않으므로 또 다시 엄한 독촉이 내렸다 마침
내 아들로써 대행하도록 하여 관직에 나아가게 하고 몸소 밭을 갈며 출사할 뜻이 없음을 보
여 주었다.
그리고 두문동 제현들과 더불어 송도에서 몸을 깨끗이 닦고 함께 맹세하여 의리를 지키고
충절을 온전하기로 다짐했다 송도 개성 에는 세신정이라는 우물과 희맹대라는 장소가 남아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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