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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되고 영의정을 지냈다 시호를 충경이라 하고 태조의 묘정에 배식되었으며 부조묘를 명했
남효온(
)? (1454 1492)
자는 백공
이요 호는 추강
이며 본관은 의령이니 직제학
의 증손
으로 진사에 올랐다.
? 18
세때에 소릉
단종의 생모 현덕왕후의 능 의 복구를 세조에게 상서했으며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다.
일찍이 육신전을 지었는데 그 문인들의 큰 화가 이를 것을 두려워하여 저술을 하지 말라고
건의하자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며 대현의 자취를 없어지게 할 수 있는가
라고 말하고 또 야사를 지었다 연산군때 갑자사화
(1504 )
년 가 일어나자 소릉회복 상소문 때
문에 남효온의 무덤을 파 헤치는 화를 입었다 정조때에 이조판서를 추중하고 시호를 문정이
라 하였으며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영월의 창절사에 배향되었다
맹계증(
본관은 신창이며 명신 사성
의 후손이다 문장과 학식이 높아 세자 세마벼슬을 했고
공조참판에 추증되고 신원군을 봉했다
맹 도
자는 사후
요 본관은 신창이니 명신 사성
의 후손이다 무과 급제하여 훈련관이
되었고 인조때 갑자년 이괄의 반란에 안현전투에서 대첩을 거두어 진무 이등 공신에 책록되
고 병자호란 때에는 남한산성으로 인조를 호가했는데 피부가 동상을 입어 상하고 손과 발이
모두 터진 것을 본 왕은 그의 충성을 가상하게 여겨 선전관을 특제하였고 강화도에 두 차례
나 사신으로 다녀왔다.
한호 김원행이 지문을 지었고 종친인 뇌풍재 홈요가 행장을 지었다 묘는 송악면 동학리의
백화동 사좌에 있고 묘표가 있다
맹사성(
)? (1359 1438)
자는 성지
이요 호는 고불
이며 본관은 신창이니 제학
희도
의 아들이
다 고려조에서 생원 진사를 거쳐 문과에 장원급제하였고 조선 왕조에 들어와서 송경을 바라볼
면목이 없다고 생각하여 검은 소를 거꾸로 타고 서울을 왕래했다 대사헌으로 있을때에 태종
의 부마 조대림이 특권을 가지고 백성을 학대하므로 왕에게 보고하지 않고 처단했다 성격이
맑고 전결하며 단정하고 무게가 있었다 재상이 되어서는 대체를 유지함에 힘썼다 세종때에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렀는데 태종실록이 완성되자 세종이 이것을 읽어 보려고 하였다 사성
이 말하기를
실록은 모두 당세의 사실을 기록한 것이므로 임금께서 만약 한 번 읽어 보신다면 사관이
남효온(
)? (1454 1492)
자는 백공
이요 호는 추강
이며 본관은 의령이니 직제학
의 증손
으로 진사에 올랐다.
? 18
세때에 소릉
단종의 생모 현덕왕후의 능 의 복구를 세조에게 상서했으며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다.
일찍이 육신전을 지었는데 그 문인들의 큰 화가 이를 것을 두려워하여 저술을 하지 말라고
건의하자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며 대현의 자취를 없어지게 할 수 있는가
라고 말하고 또 야사를 지었다 연산군때 갑자사화
(1504 )
년 가 일어나자 소릉회복 상소문 때
문에 남효온의 무덤을 파 헤치는 화를 입었다 정조때에 이조판서를 추중하고 시호를 문정이
라 하였으며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영월의 창절사에 배향되었다
맹계증(
본관은 신창이며 명신 사성
의 후손이다 문장과 학식이 높아 세자 세마벼슬을 했고
공조참판에 추증되고 신원군을 봉했다
맹 도
자는 사후
요 본관은 신창이니 명신 사성
의 후손이다 무과 급제하여 훈련관이
되었고 인조때 갑자년 이괄의 반란에 안현전투에서 대첩을 거두어 진무 이등 공신에 책록되
고 병자호란 때에는 남한산성으로 인조를 호가했는데 피부가 동상을 입어 상하고 손과 발이
모두 터진 것을 본 왕은 그의 충성을 가상하게 여겨 선전관을 특제하였고 강화도에 두 차례
나 사신으로 다녀왔다.
한호 김원행이 지문을 지었고 종친인 뇌풍재 홈요가 행장을 지었다 묘는 송악면 동학리의
백화동 사좌에 있고 묘표가 있다
맹사성(
)? (1359 1438)
자는 성지
이요 호는 고불
이며 본관은 신창이니 제학
희도
의 아들이
다 고려조에서 생원 진사를 거쳐 문과에 장원급제하였고 조선 왕조에 들어와서 송경을 바라볼
면목이 없다고 생각하여 검은 소를 거꾸로 타고 서울을 왕래했다 대사헌으로 있을때에 태종
의 부마 조대림이 특권을 가지고 백성을 학대하므로 왕에게 보고하지 않고 처단했다 성격이
맑고 전결하며 단정하고 무게가 있었다 재상이 되어서는 대체를 유지함에 힘썼다 세종때에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렀는데 태종실록이 완성되자 세종이 이것을 읽어 보려고 하였다 사성
이 말하기를
실록은 모두 당세의 사실을 기록한 것이므로 임금께서 만약 한 번 읽어 보신다면 사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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