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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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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였다. 마침 가을비가 오는 중이라, 옷이 젖어 긴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그런 이
야기를했다는것이었다.부잣집은말할것도없이기와집이었고,마을에거주하는전주이씨의
입향조가만든집이었다.마침이때집주인이놀음을하여재산을막없애는중이었다.
이에 마을이 발칵 뒤집혀, 모두 나와서 성너머방죽에서 성너머 마을로 나가는 물길을 자
르고,시루뫼마을로돌려내었다.그래서마을의서편개가생겼고,원래흐르던마을동쪽의
내는동편개라고하였다.
1950년대증산리의간척사업은이종렴씨,이승규씨,오하남씨가하였다
1950년대증산리에는간척사업이활발하였다.제일먼저간척한사람은일제강점기초기
에 교편을 잡았던 이종렴 씨였다. 구술해 주신 이풍호 씨의 당숙으로 주산초등학교에서 근
무하였고, 칼을 차고 근무했다고 한다. 학교에서 받은 월급을 모아 간척을 했는데, 먼저 증
산리 방죽굴 앞에 50여 마지기의 간척을 하였고, 이어 성너머에서도 20여 마지기의 간척을
하였다.당시증산리의두번째부자라고하였고400석정도를하였다.
다음에는 이철원 선생의 부친인 이승규 씨가 20여 마지기의 간척을 하였고, 이철원 선생
의 부인인 오하남 씨도 자금을 대어 20여 마지기의 간척을 하였다. 증산리에서는 이런 간척
지를언답(堰畓)이라고하였다.
간척지에는 중나무 같은 큰 나무를 반으로 갈라, 속을 파낸 후 맞추어 수멍을 만들어 넣
었다. 이 수멍을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고 힘들었다. 바닷물이 들어오면 밖에서 막고, 물을
가두어 두기 위해서는 안에서 막아야 했다. 바닷물은 밤에도 들어오기 때문에 밤에도 나가
수멍관리를해야했다.수멍의마개는짚으로만들었다.
수멍은어린이들이들어갈만큼컸고,몸집이작은사람이들어가게를잡기도하였다.
이풍호씨는어머니가돌아가신뒤,
아버지시신을옮겨와어머니와함께하룻밤을모신후합장하였다
이풍호씨의아버지가돌아가신후2년이지나어머니가돌아가셨다.아버지의묘자리가
마음에들지않아어머니와함께새로운자리로모시기로하였다.그래서어머니장례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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