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823페이지

171페이지 본문시작

보령시
169
증산리시루뫼기와집은500석을하고,일하는사람이12명이나되었다
증산리 시루뫼 기와집은 근동에서 가장 부잣집이었다. 옛날부터 전해오는 유산이 있었
고, 남는 곡식으로 논을 계속해서 사 부자가 되었다. 소작료까지 합하여 매년 쌀 500석을
거두었고, 일하는 사람이 12명이나 되었다. 전해오는 말로 3일에 한 번씩 두부를 했다고 한
다.집안에전해지는이야기는장손집안은아들들이일찍죽어과부들만있었기때문에작
은집에집과재산을주고,다른집으로이사했다고한다.
시루뫼마을전주이씨집안에는산직집이3가구있었다
시루뫼마을전주이씨집안에는선조들의산소를관리하고,시제때제물을차리는산직
집이 3가구 있었다. 한 분은 3대에 걸쳐 산직살이를 하여, 전주이씨 집안 묘역이 있는 산에
묘를쓰기도하였다.산지기집안묘역의비에갓석을씌운것이문제가되기도하였다.
이철원선생의아버지이승규씨는큰아버지에게양자를갔다
학문으로 유명한 이사욱 선생은 아들 둘을 두었다. 이승규, 이항규이다. 그러나 이사욱
선생 형님의 후손이 없기 때문에 큰아들인 이승규 씨가 큰아버지에게로 양자를 갔다. 그의
장남이이철원선생이다.
이승규씨는경기도양주에서종회장을하면서대학에출강하였다
이승규 씨는 한학자로 경기도 양주에 거주하면서 서울 한양대학에 출강하였다. 당시 경
기도 양주에는 증산리 시루뫼 전주이씨 집안의 선조 묘지와 종중토지, 가옥까지 있었다. 이
승규씨는종중회장을하면서양주에서거주하였다.
이승규씨는고향에내려와둘째아들과생활하며간척사업을하였다
이승규씨는고향인주산면증산리시루뫼마을에내려와큰며느리(이철원의부인),둘째아
들과 함께 생활하였고 간척사업을 하였다. 서울에서 벌어온 자금이 있어 간척을 하여 성공
하였다.20여마지기의논을간척하였다.

171페이지 본문끝



현재 포커스의 아래내용들은 동일한 컨텐츠를 가지고 페이지넘김 효과및 시각적 효과를 제공하는 페이지이므로 스크린리더 사용자는 여기까지만 낭독하시고 위의 페이지이동 링크를 사용하여 다음페이지로 이동하시기 바랍니다.
상단메뉴 바로가기 단축키안내 : 이전페이지는 좌측방향키, 다음페이지는 우측방향키, 첫페이지는 상단방향키, 마지막페이지는 하단방향키, 좌측확대축소는 insert키, 우측확대축소는 delete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