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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920년대이후독립운동
장에는 이종승, 부회장에 김진동을 선출하였다. 신간회 예산 지회 회원인 성진호(成瑨鎬)는
예산청년회 농민부원으로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겪었으며, 신간회 활동을 하던 유진
1919년 3.1운동 직후 충남에 지부를 두고 임시정부와 연계 하에 조직된 비밀 단체로 대
희(兪鎭熙) 역시 총독정치 배격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한독립단이 있다. 대한독립단은 1919년 5월 서울에서 조직되었는데 논산 출신의 신현구가
한편 3.1운동을 경험한 학생들은 이미 독립운동의 주체로서의 역량이 성숙되어 있었으
단장이다. 이 단체는 충남지단을 설치하고 예산과 청양 등지에 지회를 설치하였다. 충남 지
니 민족 지성을 대변하는 계층이었다고 할 것이다. 학생들은 대내적으로 식민지 사회의 모
단장에 서병익(徐丙益), 부단장 김석주(金錫周), 그리고 예산 출신의 조인원(趙仁元)이 서
순을 극복하고 대외적으로 일제의 침략과 억압에 대항하는 민족 운동을 전개하였다. 학생운
무부장을 맡아 각종 독립운동 관계 문건의 배포에 주력하였다. 서인원은 1920년 12월 20일
동은 3.1운동 당시의 만세 시위 운동을 비롯하여 동맹 휴학, 비밀 결사 활동, 농촌 계몽 운동
(음)에 ‘한국인은 납세(納稅)하지 말라.’는 내용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정서(軍政署) 명의
등 다양한 방법으로 전개되었다.
로 된 선전문을 삽교면 역촌리 게시판에 부착하는 등 활약하다가 체포되어 1921년 9월 21
1920년대 학생들은 일제의 노예적인 식민지 교육에 항거하여 동맹 휴학을 벌였다. 맹휴
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실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의 원인은 대부분 민족 차별 교육에 있었다. 일본인 교사의 조선인 차별과 식민지 교육에 대
1920년대 청년 학생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3.1운동 이후 각성한 청년들은 1919년
한 항거가 주요 원인이 된다. 맹휴에 관련된 교사는 휴직당하였고 학생들은 퇴학 처분을 당
말부터 지역별로 각종의 청년회를 조직하였다. 청년회가 내세운 목표는 품성의 향상과 지식
하였다. 학생들은 조선학생과학연구회와 같은 학생 단체를 조직하여 전국적 규모의 학생운
계발, 풍속 개량, 사회의 계도 등을 들고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민족의 자주 독립에 그 목적
동으로 발전시켰으며, 6.10만세운동을 주도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학생운동은 광주학생
이 있었다. 청년운동은 1926년의 6.10만세운동, 신간회운동, 그리고 1929년의 광주 학생운
운동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동과 긴밀한 연계 하에 전개되었다.
광주학생운동은 예산 지역에도 파급되었다. 이어 동향 출신인 윤봉길의 상해의거가
일제의 식민화 교육정책에 대항하기 위하여 1922년 말 서울에 민립대학기성회가 조직되
있자, 이에 예산 지역 청년들의 항일의식이 고양되었다. 윤봉길과 함께 월진회를 조직하
었다. 각 지방별로 발기인 모임을 결성하였는데 이때 홍성 출신인 한용운이 중앙집행위원에
여 활동하던 정종호(鄭鍾浩)는 상해의거에 큰 자극을 받았다. 예산공립농업학교에 재
피선되었으며, 충남 지역에서도 예산(대표: 辛益敎)을 비롯하여 당진(李春世), 아산(柳冀
학 중이던 그는 강봉주(姜鳳柱), 한정희(韓定熙) 등과 비밀리에 독서회(讀書會)를 조직
英), 청양(禹錫琪), 공주(柳靖鉉) 지역에서 지방부를 조직하여 기금을 모금하였다.
하여 활동하였다. 상해의거 직후인 1932년 5월 초순 그는 박정순(朴正淳), 박희남(朴熙
南), 오일규(吳日圭) 등의 독서회와 통합하여 좌익협의회(左翼協議會)를 조직하였다.
예산에서의 신간회운동 역시 활발히 전개되었다. 신간회는 서울에 본부를 두고 전국에
지회를 설치하였다. 1927년 신간회가 창립될 때 발기인으로 참여한 충남 지역의 인물로는
이들은 한인 학생의 차별 개선과 한인 교사의 확대 등을 주장하며 동맹 휴학을 주도하였
이상재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상재는 1924년 9월부터 조선일보 사장에 취임하여 조선일
다. 그러나 학교 당국으로부터 회원들이 다수 학사 처분을 받게 되자, 같은 해 9월 18일
보를 민족지로 육성하려고 노력하였다. 신간회에서는 민족의 자주 독립의식을 고취하기 위
정종호, 강봉주, 한정희, 박희남 등은 예산학생동맹(禮山學生同盟)을 조직하였다. 그해
하여 전국에 지회를 설치하였다. 충남에서는 예산을 비롯하여 홍성, 당진, 서산, 공주, 부여,
11월경 토요회로 명칭을 바꾸고 활동 중에 관제연극 단체인 만경좌(萬鏡座)에서 반민족
천안에 지회가 설립되었다. 예산지회는 1927년 11월 이승복(李昇馥)이 이관용(李灌鎔), 권
적인 내용의 ‘동방의 빛’이라는 연극을 예산읍에서 상영함에 공연 중단을 요구하는 활동
태석(權泰錫) 등과 함께 주도하여 조직하였다. 이남규의 손자인 이승복은 노령과 북만주 지
을 하였다. 이 일로 정종호 등은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예산 출신으로 공주 영
역에서 활동하다가 귀국하여 임시정부의 국내 연통제 조직과 군자금 모금에 힘썼다. 김상옥
명학교 재학 중 동맹휴교를 주도한 일로 퇴학 처분을 받은 김현창(金顯昶)도 공연 중단
의거에 연루되어 고초를 겪었으며, 신간회 결성에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예산지회의 회
운동에 참여하여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3.선비의고장,예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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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의뿌리예산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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