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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인(
본관은 안동이며 헌납
중헌
의 아들인데 진사에 합격했다
김 구
金鉤
)? ( ?
1462)
자는 직중
이요 호는 송정
이며 본관은 경주이니 대사헌 광수
의 아들이다
세종때에 문과급제하여 대제학 판충추부사에 올랐다 경학이 정박했으며 성균관에 벼슬할 때
에 가르치기를 게을리 함이 없어 윤상 이후에 제일인이라고 하였다.
단종초에 나라의 형세가 어지러워지는 것을 보고 아산 땅으로 은거하여 오교대
敎坮
를 축
조하였다.
세조가 제학의 벼슬을 주고 아홉 차례나 불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았으므로 왕이 크게 노하
여 벼슬을 삭탈하여 서인을 만들었다 성종때에 신원되어 관작이 회복되고 시호를 문장이라
했다 묘는 아산현 일북면 사기동에 있다
김 근
金瑾
자는 중보
요 호는 양한재
이며 본관은 김해이니 충간공 보
의 후손이다 숙
종때에 생원이 되었는데 자질이 순수하고 지조가 깨끗하였으며 어려서 학문을 좋아하였다
맑은 시냇가에 집을 짓고 양한재
라는 편액을 걸어 우의하였다
김남찬(
金南
자는 자명
이요 본관은 김해이며 충간공
簡公
의 후손으로 장사랑
되었다 효행이 출천하여 어버이를 정성껏 섬겼다 부친의 병환에 배를 구하기 위하여 눈길을
걸어 배나무 아래를 지나가는데 싱싱한 배가 저절로 떨어져서 갖다 드렸다 그리고 추운 겨울
에 미나리를 잡수시고자 하므로 눈이 덮인 시냇가에 나가 울면서 미나리를 구하려고 했는데,
때마침 길게 자란 미나리를 발견하여 가지고 와서 공양했다 사람들은 그의 효성에 감응한 것
이라고 칭찬했다.
김남혁(
金南
자는 여회
요 본관은 김해이며 효자 장려를 받은 현
의 아들이다
살에 능히 문장
을 지었으며 바른 행실로 가정의 법도를 계승했다
병자호란에 부친이 효도로 적군에게 피살되었을 때에 나이 어린 몸으로 삼년상을 치르고
평생의 통한이 되어 삼년동안 상복을 더 입었다 원수를 갚기 위하여 편발을 하고 심양의 두
차례나 들어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한을 머금고 돌아왔다 끝내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으
나 문장과 학문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김덕문(
金德
자는 성백
이요 본관은 경주이며 전서
자정
의 후손이다 인조때에 훈련첨
정의 벼슬을 하였고 이괄의 반란에 진무 원종 공신이 되었다 군자감정을 추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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