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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2019
제53호
제53호
지역학칼럼
예산학특강-내포지역의개신교전래
3.내포의개신교인
동향에 민감하거나 그런 상황을 주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어서, 근대화의 추세에 적극적이
다.②정도의차이는있지만그들개인의의지가향촌사회의의사결정에일정한영향을끼치고있
다. 그런데 그 영향력의 정도는 그들이 세우는 교회의 규모에 거의 비례한다. ③ 그리고 그들은 기
(1)갈산교회이인주
독교 수용에 적극적이어서 스스로 향촌민들에게 교회 가입을 권유하여 어떤 개종의 분위기를 주
도하고 있으며,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들 중 상당수가 교회와 학교의 설립을 병행하고 있다. ④
내포를 비롯 충남 개신교 선교 초기에 먼저 관찰되는 교회 수립의 양상은, 향촌사회 내부에 개
그런데 이들의 기독교 지향적 태도는 순수한 종교적인 관심이라기보다는 그들이 대안으로 여겼던
신교 수용을 주도하는 인사들의 존재와 영향력에 의해 교회가 시작되고 있다는 점이다. 1906
근대성의물질적ㆍ정치적측면과기독교를동일시한데서온것이라고생각된다.이렇게여기는이
년 11월부터 광범위하게 충청지역을 순회한 감리교 선교사 스웨어러는 “여러 군데에 이미 지
유는 이 지역 기독교의 흐름이 그 후에 점차 (오직 종교적인 측면만을 강조하는 非정치화의) 복음
도력을 행사하고 있는 인물들”(men who had already taken the leadership in their different
주의 부흥운동의 강력한 색채를 드러내면 낼수록 이들이 교계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영향력이 동
sections)이 존재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데, 내포의 경우 1905년 세워진 홍성 갈산교회의 설립
반퇴조하는현상이나타나기때문이다.
주역이인주가바로그런유형에적합하다.
갈산의 전주이씨 토착세력이었던 이인주는 1904년경 북장로교 선교사 밀러(Frederick S.
(2)예산교회최성모
Miller, 민로아)의 전도로 개종한 이후, 이어서 자신이 인도한 이회연, 전용규 등과 함께 갈산교회
를 세워나가게 된다. 그런데 그는 교회의 창설자일뿐 아니라 그 지역사회의 모습을 바꿔놓은 농촌
예산제일감리교회제5대담임목사인최성모는3.1운동민족대표로유명하다.그는1874년서울
의개척자요,학교의설립자이기도했다.그는교회의지방사역자(localpreacher)로일하면서,농
안국동에서 출생하여 14세 때인 1888년(고종 11)에 시행된 무자식년시 사마시 진사과에 급제했
사에 열중하여 1920년경에는 상당한 재산을 모으게 된다. 1925년 홍성지방 감리사 김유순은 그
다. 그러니까 소과에 합격하여 과거의 본격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대과에 응시할 자격을 얻은 것
가예배당과학교의기금을마련하는데상당한기여를했으며,또그는더욱사업을번창시켜서그
이다. 전체 324명 가운데 216등의 성적이었다. 최성모가 나중에 진사목사라고 불리게 된 연유이
돈을 지역교회를 위해 사용할 예정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가 갈산교회와 더불어 나란히 세운 광
다. 어린 시절 그가 수행했을 집중적인 성리학 학습은 깊숙이 내면화되어 향후 그의 인생 전체를
성학교는당시그지역의유일한교육기관이었다.
지배하는기저로작용했으리라고본다.
1930년갈산을방문한의기자는“40호쯤되는가난했던마을이이인주의독려로
그의 개종은 1907년 무렵 이루어졌다. 1907년 무렵 상동교회 전도사 이필주의 권유로 그곳에
말미암아 거의 자작농으로 일어섰으며, 동네사람 대부분이 교회에 나오면서 근처에서 술 담배를
가서 담임목사 전덕기의 설교를 처음 접한 최성모는 그 열변의 내용에 매료되어 즉각적으로 반응
찾아볼 수 없는, 논과 밭에서 기도와 찬송이 넘치는” 풍경을 스케치하고 있다. 그는 이 “촌교회
했다. 집으로 돌아와 상투를 자르고 그 다음 날부터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이제와는 전혀 다른
에 150명씩 모이는 것이 기적”이라고 환호하면서 학생 70명이 모이는 광성학교와 소비조합, 양
새로운 생애가 그의 앞에 열리고 있었다. 당시 항일구국운동의 본산이었던 전덕기 목사의 상동교
돈과 양계의 예를 들어 이곳을 “모범 농촌 이상촌”이라고 자랑하고 있다. 갈산교회의 수립과 그
회에 가담, 이른바 ‘상동파’의 일원으로 활동하면서 기독교민족운동가로서의 길을 가게 되었던
독특한기독교적향촌사회의형성은이인주의기독교적영향력에서비롯된것이다.
것이다.
이런 예는 다른 곳에서도 충분히 관찰된다. 즉 논산 가야곡 육곡교회와 부여서씨(서기훈), 유성
그는 전덕기의 권유로 1910년부터 1913년까지 서대문밖 감리교협성신학교에서 공부했다. 그
원동교회와 이도명, 한산 연봉교회의 김규배, 금산 지방동교회의 류기택, 임천 초왕교회 고내수,
사이최성모의중요한활동공간은바로YMCA였다.그는월남이상재와함께YMCA에서활동했
목천 용두리교회의 유중무, 부여 규암의 김성기 등이 대표적인데, 그 외에도 훨씬 더 많은 경우를
다. 신학교 졸업 후 최성모의 첫 목회지는 1902년 5월 세워진 서강교회였다. 당시 그의 설교는 신
제시할수있다.
앙을 통해 구국의 사명을 다해야 한다는 지극히 민족주의적인 내용이었지만, 그 특유의 해학이 섞
이들충남의초기기독교주도층인사들은몇가지공통점을갖고있다.곧①그들중다수는신
인 이야기로 젊은이들은 물론 어린아이들도 쉽게 이해하며 감명을 받았다는 증언이 전해진다. 그
분상중간층으로자신들의향리에경제적기반을지니고있으며,또시대의흐름과서울의정치적
의원숙한성리학적교양과신학으로다져진기독교에대한깊은이해에더해그가구사했던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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