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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로보는천수만?15
3)
가장 많은 지리·문화적 정보가 수록된 지도는 1872년의 지방도이다.
천수
만 영역만 살펴보면 위와 같다. 이 지도는 현재의 해안선과 그 위치는 다르지
만 그 안에 묘사된 내용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선 현재의 부남호와 간월호
가 비교적 잘 묘사되어 있는데, 내만된 두 지역의 지리적 정보가 비교적 상세하
다. 육지에서 바다로 이어지는 두 개의 물줄기는 당시 중요한 물길로 동부의 오
푼 - 해미천 - 대교천으로 이어지는 물길이며, 서부의 물줄기는 가사리와 태안
을 가로질러 흐르는 인평천으로 볼 수 있다. 인평천의 윗부분에는 흥인교(興仁橋
川派)라 쓰여 있다. 이곳은 고려시대부터 지속적으로 추진된 굴포운하가 시작되
는곳이다.
두 개의 내만 된 지역에는 삐죽하게 돌출된 곳이 있는데, 화변면이라 명기
된 곳은 현재의 부석면이기에, 끝부분을 창리이고, 중앙의 육지에서 삐죽이 나
온 부분은 양대동으로 볼 수 있다. 화변면 끝에는 주사창(舟師倉)이라 쓰여 있고,
그 양옆으로는 흑서(黑嶼)와 간월도(看月島)가 묘사되어 있다. 이외에 강경리포(江鏡
里浦), 갈마리포(葛馬串浦)의 포구가 기록되어 있다. 이중 갈마곶포만이 위치가 일
치하지않는데,갈마곶포는강경리아래쪽에위치해있었으나흑서옆에기재되
어있다.이는갈마곶포와흑서모두갈마곶리에속했기때문이아닐까한다.갈
마곶포와강경리포이외에도여러포구가확인되지만이시기에는이두포구가
중요한 역할을 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석사 왼편에는 취포시(翠浦市)라 표기
된것은서산장과더불어서산현의대표적장시였던취포장으로볼수있다.
3) 이 지도는 조선사회가 지니고 있는 총체적인 문제로 인해 국가정책의 집행이 어려워지자 집권한 흥선대
원군이 과감한 개혁을 추진했다. 특히 두 차례의 양요(洋擾)를 겪으면서 서양의 침략에 적극적인 대응책
을 모색하기 위해 국방과 치안을 위한 관제 개정, 군제(軍制)의 개편, 군사시설의 확충과 경비의 강화, 군
기(軍器)의 정비와 실험 등을 시도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지방의 실정 파악은 시급한 과제였고
이를 위해 1871년에는 전국적인 읍지(邑誌) 편찬사업을, 이듬해인 1872년에는 전국적인 차원의 지도제작
사업을 추진해 제작된 것이다. 이 내용은 서울대 규장각의 1872년 지도 총설의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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