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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읽는 고전
왕양명
『전습록(
이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왕양명(
1472-1528)의 강학(講 )을 기록한 양명학의 교과서다. 사실 우리
에게 양명과 양명의 학문은 오랫동안 불온하고 위험한 기호였다.
조선이 500년간 주자만을 정학(
)으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하지
만 왕양명은 동아시아 사상사에서 주자에 비견되는 유일한 사상가
로 평가받는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그것이 과거에 어떤 평가
를 받았는가를 기억하는 데 있지 않다. 중요한 건 지금 우리에게 바
로 그 텍스트가 어떤 의미인가를 묻는 데 있다.
『전습록』
을 읽다보면 재미있는 경향이 보인다. 그것은 왕양명과
그의 제자들이 일상적인 강학(講 )의 시간 속에서, 철학적인 논변들에서, 그리고 정서적인 감정의 흐
름 속에서 나란히 유동한다는 것이다. 물론 양명학에서도 제자들은 묻고, 스승이 대답한다는 강학의
풍경은 여느 학파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양명학단(
)에서 이 관계는 결코 일방적이지 않
았다. 그들은 앎과 삶이라는 물음 앞에서 함께 지혜를 모으고자 했던 일종의 지식 공동체였다.
그렇기에 스승의 대답은 지금 자신에게 물음을 던졌던 바로 그 제자의 것이다. 오늘날로 치면 일대
일 맞춤형 문답이다. 스승의 말씀 없이는 앎이 이루어질 수 없지만, 스승의 그 말씀은 역으로 제자의
질문을 통해서만 돌아온다. 스승과 제자는 이렇듯 앎과 삶이라는 현장을 구성하는 동시적 상관자들인
것이다. 이것은 또한 학문에 관한 동아시아적인 전통의 모습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배우고 묻는 그것
이야말로 배우고 묻는다는‘학( )+문( )’
의 본래 의미이기 때문이다. 학문은 배우고 묻는 과정이지
배움과 물음의 목표가 아니다.
앎과 삶의 공동체를 보여주는 양명학단의 일
화 하나! 1524년, 68세의 동라석(
)이 53
세의 왕양명을 찾아 갔다. 동라석은 교조화된
주자학자들의 지리멸렬함을 비판하며 시사(
)를 꾸려 전국을 주유하던 기인(奇 )이었다.
왕양명은 이 범상치 않은 선배의 방문을 극진
한 예로 맞이했다. 사실 동라석은 왕양명을 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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