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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경주김씨 김구
| 金鉤
<1381년(고려 우왕 7년) ~ 1462년(세조 8년)>
조선 초기의 문신·학자이며 경주김씨(慶
州金氏) 아산시 지역 입향조이고 문장공파
(文長公派) 파조이다. 그가 처음에는 음봉면
신수리 숯골로 내려왔다가 뒤에 영인면 구
산으로 옮겨 살았다. 대략 550여 년 전의 일
이다. 현재 영인면 와우리에 살고 있는 김성
우(金聖友, 77세)씨의 19대조이다.
고조는 조선왕조 개창에 공을 세워 순충분
의 익대공신이 된 숭록대부 찬성 제숙공(齊
-경주김씨 문장공파 납골당-
肅公) 김균(金 )이고 증조는 형조판서를 지
낸 김맹성(金孟誠)이며 조부는 한성판윤을
역임한 김영부(金榮富)이다. 아버지는 문과 급제 후 대사헌에 오른 김광수(金光
, 粹)이다.
자는 직중(直中), 호는 송정(松亭)·귀산(歸山)이다. 대사성 윤상(尹祥)의 문인이며 1416년(태종 16)
에 문과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거쳐 중추원부사에 올랐다.
1459년(세조 5)에 충청도 관찰사 황효원(黃孝源)이 특별한 주장하여 아산현이 폐지되어 온양군·신
창현·평택현에 나뉘어 속하게 되었다. 관사(官舍)와 관전(官田)은 영의정 황수신(黃守身)이 차지하
였다. 그가 아산 출신 현감 조규(曺圭)와 더불어 조정에 복현(復縣)을 청했다가 1462년(세조 8)에 사
헌부의 탄핵으로 고신을 삭탈 당했다. 그가 죽은 뒤인 1465년(세조 11)에 왕이 온양온천에 행행(行
幸)했을 때 조규 등이 다시 상소하여 마침내 어명으로 아산현이 복구될 수 있었다.
김구는 경사(經史)에 밝고 주자학에 정통하였고 성균관에서 후진 교육에 큰 성과를 내어 김말(金
末)·김반(金泮)과 함께‘경학삼김’
(經學三金),
‘관중삼김’
(館中三金)이라 불렸다.
그는 단종(1452~55 재위) 시기에 일시 관직을 버리고 아산(영인면 구성1리-귀산)에 낙향하여 오교
대(五敎臺)를 축조하여 인재를 양성하였다고 하며 말년에 아사(餓死)하였을 만큼 청빈한 생활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문장(文長)의 시호를 받았고 염치 인산서원(仁山書院) 배향이 논의되기도 했으며
문집으로《귀산김선생실기(歸山金先生實記)》
가 전해진다.
그의 묘는 사패지였던 음봉면 산정리에 있었으나 2007년에 집안에서 구성리에 납골당을 만들어 모
셨다. 후손들은 영인면 구성1리를 중심으로 온양, 조치원, 서울 등 각지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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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입향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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