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召)와 함께《초학자회(初學字會)》
를 우리말로 옮겼다. 1459년에는 군기부정 김석제(金石梯)와 함게 새로
운 진법(陣法)을 연구하였고 다음 해에 최항(崔恒)·정인지(鄭麟趾) 등 9명과 함께《손자주해(孫子註解)》
를 고쳐 정리하는 등 한문 자료의 국역에 많은 공을 세웠다.
1459년(세조 5)에 계유정난의 정난공신이자 당시 충청도 관찰사 황효원(黃孝源)이 공과 재물을 탐하여
특별한 이유 없이 주장하여 아산현이 폐지되었다. 온양군·신창현·평택현에 나뉘어 속하게 되었고 관사
(官舍)와 관전(官田)을 영의정 황수신(黃守身)이 차지하게 되었다. 이에 그가 아산 출신 현감 조규(曺圭)와
더불어 조정에 복현(復縣)을 청했다가 1462년(세조 8)에 사헌부의 탄핵으로 고신을 삭탈 당했다. 그가 죽
은 뒤인 1465년(세조 11)에 왕이 신병 치료를 위해 온양온천에 행행(行幸)했을 때 조규 등이 다시 상소하
여 마침내 어명을 받아내기에 이르렀으니 그는 아산현의 복구에 큰 공을 세운 것이다. 그 뒤 성종 때에 성
균생원 이고소(李古紹) 등의 상언으로 관작과 과전을 회복하였다. 그는 경사(經史)에 밝고 주자학에 정통
하였고 성균관에서 후진 교육에 큰 성과를 내어 김말(金末)·김반(金泮)과 함께‘경학삼김’
(經學三金),
‘관중삼김’
(館中三金)이라 불렸다.
그는 단종 시기에 일시 관직을 버리고 아산(영인면 구성 1리-귀산)에 낙향하여 오교대(五敎臺)를 축조하
여 인재를 양성하였다. 말년에 아사(餓死)하였을 만큼 청빈한 생활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다만 아홉 차례
에 걸친 세조의 관직 제수를 끝내 거부하자 분노한 세조가 삭탈관직하고 서인으로 만들었다는 말은 다소
와전된 듯하다. 그의 묘는 일북면 사기동(현재 음봉면 산정리)에 있었으며 나라에서 내려 준 사패지지가
지금까지 전한다. 한 때 그를 인산서원에 배향하는 일이 논의되기도 했다. 문집으로《귀산김선생실기(歸
山金先生實記)》
가 전해진다. 문장(文長)의 시호를 받았다. 묘는 최근에 후손들이 납골묘를 조성하여 영인
면 구성리로 옮겼다.
[17] 김령
金靈
< ? ~ ? >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순천(順天)이고 호는 백석당(白石堂)이며 관직은 익위(翊衛-정5품)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척화 상소를 올렸으며 사림의 거두이자 예학(禮學)의 종장인 사계
(沙溪) 김장생(金長生)이 양호 호소사(兩湖 號召使)가 되어 군량과 군사를 모집할 때 그를 의병장으로 삼
았다. 그가 이진행(李震行)과 함께 의병을 규합하던 중에 조정에서 후금과 강화(講和)하였으므로 김장생
의 명에 따라 군사를 해산하였다. 그 후 1636년(인조 14)에 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다시 척화를 상소하
였으며 그 뒤 조정에서 누차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8] 김윤
金胤
< ? ~ ? >
조선 전기의 무신이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충간공(忠簡公) 보(普)의 현손(玄孫)이다. 김해 김씨 아산
죽동(竹洞-대동) 입향조인 증 좌참찬 합( )의 손자이고 효창(孝昌)의 아들이며 자는 윤옥(允玉)이다. 세
조 때에 무과 급제하여 경력(經歷-종4품)의 벼슬까지 올랐다. 장사로 소문이 자자하던 그는 1464년(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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